2009.09.02 18:35

심부름 대행소

조회 수 432 추천 수 1 댓글 1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안경, 내 안경...”


메르헨은 바닥을 기며 안경을 찾아다녔다. 방금 폭발의 여파로 튕겨나갈 때 떨어진 모양이다. 안경을 벗어도 시력엔 크게 문제가 없지만 혼란스런 상황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안되는데 잃어버리면...”


헛되이 헤매는 손을 보며 그녀는 결국 울상을 지었다.


 


파렌의 눈이 커졌다. 이 남자가 지금 뭐라 했지?


“안데르센이라고?”


“아아, 그렇네. 본인은 Mr.안데르센. 어린이들을 사랑하는 동화 작가라네.”


태평한 목소리. 남자는 외눈 안경의 테를 잡은 채 한가로이 코덱스를 속독하고 있었다. 마치 주위의 상황은 자신이랑 상관없다는 투였다. 남자의 백색장갑은 거침없이 페이지를 넘겼다.


종잇장을 넘길수록 남자의 얼굴에 광기가 떠올랐다. 아니, 그걸 광기라 치부해야할까. 정확히는 소설의 기승전결을 알아갈수록 만족감을 떠올리는 독자에 가까웠다. 그가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책을 덮는 데는 채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음~ 꽤 괜찮은 내용이었네. 조르딕 경이 왜 이 재밌는 이야기를 끝까지 못 본지는 알 것 같아.”


그는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어 치운 뒤 포만감을 느끼는 얼굴을 지었다. 안데르센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마도 그 학자 양반은 학술서 읽듯이 이 코덱스를 대했던 모양이야. 좋지 않아. 소설을 소설로 보지 않고 그 개념파악과 거짓 신앙의 모태를 찾아 단어와 문장을 허우적거렸으니 읽을 수 없는 게 당연해. 줄거리는 즐기라고 있는 건데 해독하려 했으니 말이야. 그렇지 않은가?”


안데르센은 동의를 구하듯 말했다. 파렌은 장갑을 당겨 끼며 물었다.


“무슨 짓입니까 의뢰인. 도통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군요. 나에게는 에린실을 지키라고 시켜놓고 본인이 나타나서 이 녀석이 받아야할 책을 강탈하고 난장판을 만들어놓다니.”


“의뢰?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네만.”


“시치미 떼지마!”


외침과 함께 파렌이 발을 뗀 순간,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들이 귓전을 강타했다. 안데르센의 위아래, 왼쪽 오른쪽 전 방위에서 날뛰던 파렌은 안데르센에게 극풍으로 휩싸인 펀치를 내찔렀다.


“큭!”


파렌은 그 자세 그대로 굳었다. 후폭풍으로 안데르센 뒤쪽의 서재들이 날아갔지만 정작 본인은 옷가지 하나 흐트러짐 없었다. 주먹은 정확히 코덱스의 표지에 막혀 있었다. 낡은 종이재질이 이 일격을 막을 수 있을 리 없다. 무슨 수작을 부린 거지?


안데르센은 고개를 저었다.


“이런, 이런 말보단 행동이 빠른 청년이군. 하긴 그런 나이지. 다만...”


파렌을 향해 있던 코덱스의 표지가 일렁거렸다. 검은빛 색깔은 이내 실체를 갖고 꿈틀거리는 암흑이 되더니 파렌 쪽으로 내찔러졌다. 책에서 갑자기 길쭉한 가시가 돋아난 격이었다. 잽싸게 몸을 뺏지만 스피드 하나 빼면 시체인 파렌도 어깨를 살짝 스치고 말았다. 찢어진 재킷 사이로 붉은 실이 그어졌다.


“약하군... 몇 년 전에 봤던 청소부들도 지금의 자네보다는 강했어. 하기야, 제복을 입지 않은 걸 보니 그쪽 소속은 아닌가? 그런 거 치고는 그럭저럭 쓸만하지만. 그 정도로는 내 귀여운 아이를 지켜줄 수 없다네.”


아이? 파렌은 황급히 뒤를 돌아봤다. 에린실은 여전히 일기장을 안은 채로 주저앉아 떨고 있었다. 안데르센의 시선을 느낀 소녀는 머리를 들었다. 눈가를 슥슥, 닦으며 말했다.


“아버님...?”


안데르센은 인자한 미소를 떠올렸다.


 “그래 사랑스런 딸아.”


“아버님 에린실은 실패하지 않았...”


“알고 있단다.”


에린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소녀는 품에 쥔 일기를 떨어트리며 일어섰다.


“아버님!”


바로 그에게 뛰어가려 할 때 파렌이 손을 뻗어 소녀의 앞을 막았다.


“가지마!”


에린실은 파렌에게 경멸이 듬뿍 담긴 말을 퍼부으려했다. 이제 이 청년과는 더 이상 연결점이 없다. 안데르센은 자신은 의뢰 한 적이 없다 밝혔고 따라서 에린실은 이 거추장스런 청년을 억지로 옆에 붙이고 다닐 이유가 없다.


그 한마디를 듣기 전까지는 그랬다.


“너는... 내가 지킨다.”


소녀의 망막이 흔들렸다. 제멋대로 머릿속이 뒤엉키며 또 다시 소년과 청년의 얼굴이 떠올랐다 사라진다.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는 때로는 수줍고 때로는 비장했다. 소년의 입술과 파렌의 입술이 차츰 겹쳐진다.


소년과 청년이 동시에 말했다.


너를 지킨다.


소녀는 무너지듯 쓰러졌다. 정신을 잃기 전 중얼거렸다.


“누구를...?”


조그마한 그 말은 아무도 듣지 못했다.


“에린실? 에린실!”


파렌은 소녀를 잡고 흔들었다. 소녀는 깨어날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귀에 거슬리는 안데르센의 큭큭, 하는 웃음이 들려왔다.


“이것 참. 자네는 남의 손을 오그라들게 하는 재주가 있구만. 너를 지킨다? 구세기적 RPG 주인공의 마인드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했군.”


에린실을 곱게 눕힌 파렌은 말없이 일어섰다. 안데르센을 째려보는 그 눈엔 적의가 아로새겨져 있었다.


“질문 하나 하지.”


안데르센은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왜 우리 에린실에게 그렇게 관심을 보이는 건가? 아아, 착각하진 말게. 내 딸을 넘겨준다 라고 말하기 전에 장인어른이 흔히 말하는 뉘앙스를 풍기는 건 아니니까. 다만 순수하게 작가 입장에서 자네의 동기부여가 궁금해서 묻는 것일세.”


“동기부여?”


파렌은 두 주먹을 꽉 쥔 채로 허리를 굽혔다. 바지 끝부터 머리까지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야 뻔하지. 의뢰를 받았기 때문이다.”


안데르센은 실망했다.


“겨우 그건가? 의뢰는 끝났어. 아니 정확히는 있지도 않은 의뢰였지. 자네와 에린실이 이어진 끈은 그 허깨비가 끝인가?”


안데르센은 파렌과 에린실이 무슨 일이 있는지 전혀 모른다. 하다못해 시시한 이야기 한토막이라도 나와 주길 바랐다. 소녀 쪽에는 시시껄렁하지만 남자 입장에서는 중요한, 사랑이 싹튼 그 첫 순간 말이다.


파렌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다.


당신을 좋아한다고 해주러 왔습니다!


청년은 얼굴을 붉혔다.


“아아 물론 있지. 내가 녀석에게 집착하는 이유.”


 “말해보게나.”


 신사는 들어주겠다는 듯이 코트를 양손으로 잡고 펼쳐보였다.


몸을 잔뜩 웅크렸다. 바람의 기류가 더욱더 거세지며 회오리쳤다.


“내가 녀석에게 집착하는 이유. 그건!”


파렌은 극풍에 몸을 맡겼다. 도서관의 부서진 난간, 넘어진 서재의 모퉁이. 천정 등을 스무 번 이상 박찼다.


“바로!”


안데르센의 등 뒤 정확히 사각을 노렸다.


청년이 외쳤다.


“바로 아직 출장비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말의 충격에 안데르센은 코덱스마저 떨어트리며 비틀댔다. 파렌의 일격은 그 틈을 정확히 비집고 들어갔다. 발차기가 안데르센에게 닿기 직전, 그의 몸이 사라졌다. 허공에 떠있는 꼴이 된 파렌을 지팡이로 후려쳤다.


“컥!”


벽에 부딪치자 극한으로 올린 가속은 고스란히 데미지가 되어 돌아왔다.


“난 자네를 용서할 수가 없을 거 같군.”


안데르센은 코덱스를 주워들었다. 신사의 모노클이 차가운 은색으로 빛났다.


무너진 벽을 치우며 파렌이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후후, 겨우 이 정도냐.”


그 말을 끝으로 파렌은 피를 한 모금 토하고 도로 무릎을 꿇었다. 그의 눈이 경악으로 젖어 있었다.


“어, 어째 서지. 보통은 이렇게 허세를 떨면 주인공의 각성으로 이루어지는데!”


안타깝게도 세상은 자기 뜻대로 돌아가는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안데르센은 지팡이를 빙글빙글 돌리며 파렌에게로 걸어갔다. 한걸음 한걸음에 무게가 실려 있었다.


“원래 시나리오는 이랬다. 에린실이 곱게 코덱스를 가져다준다. 나는 창이 있는 흔들의자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며 정독한다. 평화롭고도 아름다운 이야기지. 그런데 자네의 존재는 쓸데없는 전투씬을 늘어나게 하는군.”


“후우 그래?”


파렌은 어떻게든 다시 일어섰다. 그리고 안데르센을 향해 손가락 두개를 펼쳤다.


“미안하지만 넌 날 이길 수 없다. 우주적 진리와 필적하는 대전제 두 가지가 나에게 웃어주고 있으니까.”


“방금 자네 스스로 허세로는 상황이 바뀌지 않음을 증명하지 않았나?”


“하나하나 알려주지.”


안데르센은 걸음을 멈췄다. 공기가 바뀌었다. 이미 파렌의 초음속 공격에 난도질당해 있던 기류의 파편이 다시 요동쳤다.


“첫째. 히로인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주인공은 절대로 지지 않는다.”


파렌은 장갑을 풀어 떨어트렸다. 무거운 금속이 충돌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이 흔들렸다.


“둘째. 주인공은 히로인을 지키는 전투에서 무조건 이긴다!”


“...똑같은 소리 같네만?”


“간다아아아아아!”


파렌은 열혈만화에 나올법한 괴성을 지르며 땅을 박찼다. 본래 그의 공격 메커니즘은 이리저리 날뛰며 가속을 더함과 동시에 급소에 일격을 가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각을 노린 공격이 모조리 막히는 걸 이미 경험한 파렌은 이번엔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페이크 하나 없는 단순한 직선 공격이었지만 사력을 다했기에 그 속도는 방금 전 공격의 3배를 넘어섰다. 지금 그의 주먹에 담긴 물리력은 건물 하나를 통째로 무너뜨릴 정도로 강렬했다.


그야 말로 필살의 한방.


다만 상대가 나빴다.


“지루하군. 그만 끝내도록 하세.”


안데르센의 시간은 남들과 다르게 흐르는 것 같았다. 눈이 깜박이기도 전에 파렌의 공격이 들어가야 정상이건만. 그는 여유롭게 코덱스를 펼쳐들고 따분한 어조로 말하기까지 했다.


“엠퍼시(empathy).”


파렌은 보았다. 안데르센의 등 뒤로 한순간이나마 검은 날개가 펼쳐지는 것을. 그것은 곧 사라졌지만 주위에 날아다니는 검은 깃털들은 그 존재의 증거가 되었다.


손바닥이 눈앞을 가렸다. 어느새 파렌의 안면을 안데르센이 손아귀로 쥐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나도 자네가 주장한 우주적 대전제를 한 가지 알고 있어서 말이야.”


그가 속삭였다.


“주인공은, 그게 어느 싸움이건. 라스트 보스와의 첫 대면에서 무조건 진다.”


어둠이 폭사했다.




 





































?
  • profile
    윤주[尹主] 2009.09.02 18:35
    의도적인 패러디같네요. 어떤 얘기를 하고 싶은 건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처음 읽을때보단 더 기대가 됩니다. 계속 건필하시길.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1700 오로지 그녀뿐인 세상 (3) 6 윤주[尹主] 2011.02.09 433 1
1699 몬스터 블라블라울라블라 2009.12.06 433 0
1698 안녕하세요 여신입니다! しろいつばさ 2009.08.18 433 0
1697 02- 제드 : 산신 - 10 복권장군 2016.10.06 432 0
1696 [가본 장소] 제주공항에서 5 윤주[尹主] 2012.12.03 432 2
1695 『호러어드벤쳐』귀신의 집 _ 5화 3 3류작가 2012.05.30 432 1
1694 그대는 나에게 수수께끼 4 평운 2009.09.09 432 3
1693 현실과 꿈 - 프롤로그 1 4 다시 2012.03.19 432 0
1692 역겁정략 1부 1장 12막 1 ㄴㅏㄹㅏㅣ 2011.09.02 432 1
1691 아름다운 공주 -2- 여행은 깨달음을 얻는 과정- 세디편(1) 1 file 다시 2011.04.11 432 1
1690 단군호녀 16화 3 file ♀미니♂ban 2011.01.03 432 3
1689 너와-1 1 220 2009.10.12 432 0
» 심부름 대행소 1 까마귀 2009.09.02 432 1
1687 추천사 <현실과 꿈> 2 윤주[尹主] 2012.07.09 431 0
1686 地獄歌 file 다르칸 2005.07.19 431 2
1685 뒤집어야 산다 2화 - 편집 #2 3 토치송 2011.03.19 431 1
1684 시크릿Secret (9) 2 윤주[尹主] 2011.03.06 431 1
1683 오로지 그녀뿐인 세상(Fake End) 4 윤주[尹主] 2011.03.02 431 1
1682 몽환의 숲 4 건망 2011.02.27 431 2
1681 [내일의 일기] 쌓아온 그 말의 횟수 4 2012.11.12 430 3
Board Pagination Prev 1 ... 131 132 133 134 135 136 137 138 139 140 ... 220 Next
/ 220






[개인정보취급방침] | [이용약관] | [제휴문의] | [후원창구] | [인디사이드연혁]

Copyright © 1999 - 2016 INdiSide.com/(주)씨엘쓰리디 All Rights Reserved.
인디사이드 운영자 : 천무(이지선) | kernys(김원배) | 사신지(김병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