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9.02 08:55

심부름 대행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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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부터 내려오던 책이 있었다.


작가도 불명, 출판사도 불명 따라서 인세를 얼마나 받고 찍어냈는지도 불명. 그 낡은 책의 알려진 정보라고는 제목과 대강적인 내용뿐. 하지만 사람들이 판단을 내리는 건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타락한 조물주의 행처를 기록한 책, 이교도의 성경 ‘코덱스’.


로넨시란 도서관에 금서(禁書)로 안치되있던 그 책은 오늘 에린실이 인계받기로 일정이 잡혀있었다. 분명 위험한 물건이니만큼 파렌은 왜 도서관 측에서 그 책을 이 소녀에게 넘기기로 한 것인지 의아했다.


에린실과 파렌은 보도를 걷고 있었다.


횡단보도에서 대기하던 파렌은 눈을 깜박이다가 땀을 흘리며 물었다.


“이, 이봐. 꼬마 아가씨. 왜 우린 단 둘이서 걷는 거지? 너한테 붙어 다니던 그 선글라스들은 어디간거야? 호위가 달랑 나 하나?”


녹색불이 뜨자 에린실은 먼저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호위는 방해니깐. 본래 당신도 불필요. 그분의 부탁이 아니었으면 옆에 두지도 않았어.”


“하아, 쌀쌀하네...”


뒤따라 걸으며 파렌은 허리를 푹 숙이고 두 팔을 늘어뜨렸다. 그렇게 걷던 파렌은 다시 땀을 흘리며 물었다.


“그, 그런데 왜 우리 이렇게 걸어가는 거지? 넌 대마법사잖아? 도서관까지 텔레포트라도 해서 가야하는거 아냐? 얼른 만능마법을 써서 독자들에게 너 자신을 어필해!”


에린실은 조금 움찔했다.


“텔레포트...?”


“응? 몰라?”


파렌은 분명히 보았다. 몰라? 라는 물음에 에린실의 얼어붙은 얼굴이 조금 부서지는 것을. 소녀는 황급히 부정했다.


“아니, 에린실은 알아!”


“그래? 그럼 써!”


“윽...”


에린실은 신음을 내며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두 번째 횡단보도 앞에서 멈췄을 때 소녀는 파렌의 종아리를 세게 걷어찼다.


“컥?!”


“그런 마법은 없어.”


한참을 고민한 끝에 나온 대답이었다.


파렌은 다리를 잡고 땅을 구르며 생각했다.


‘이 망할 세계에는 그런 간편한 마법도 없는 거냐!’


어정쩡하다 못해 부실하기까지 한 세계관을 원망하며 파렌은 에린실의 뒤를 쫓아 기어갔다.


 


“우와아아.”


로넨시란 도서관에 도착했을 때, 파렌은 탄성부터 질렀다. 수많은 책이 전시된 것을 볼 거라 생각은 했지만. 실제로 보니 그 위용부터 달랐다. 벽마다 틈 하나 없이 서재로 꽉꽉 메워져 있었고 계단이 있는 3층 구조로 이루어진 이곳은 도서관이라기보다는 예술 건축물에 가까웠다.


가식적인 묘사를 끝낸 파렌은 속마음을 밝혔다.


“젠장... 책이 너무 많으니 울렁거린다. 체력게이지가 조금씩 깎이는 기분이야...”


“하하 재미있으신 분이네요.”


“응?”


큰 안경을 쓴 소녀였다. 애초에 자기 도수에 맞지도 않은 안경을 쓴 듯 렌즈는 소녀의 작은 얼굴에 비해 너무나 컸다. 갈색 머리는 한 줄로 땋아서 목을 걸쳐 가슴에 얹었다. 품에는 책 한권을 안고 있었다. 전형적인 책벌레의 외모였다.


“로넨시란의 사서 메르헨입니다.”


“난 파렌 린스타닌. 저 꼬마의 노예다.”


청년의 표정은 진지했다.


 “예?!”


파렌이 엄지로 등 뒤의 까만 소녀를 가리키자 메르헨이 기겁했다. 동시에 관계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에린실이 날카로운 눈빛을 두 남녀에게 보냈다. 어깨를 떨며 파렌은 실없이 웃었다.


“저렇다니까. 다시 소개하지. 대행국의 분리수거반 파렌이다. 호위 의뢰로 저 상냥함이라고는 1 나노그램도 없는...”


다시 찌릿.


“...에린실 로지니안 씨의 가드(Guard)를 맡고 있다.”


“아, 예. 대행국이라하면 심부름 대행소를 말씀 하시는 거죠?”


“응.”


그 순간 공기가 변했다. 종일 공손함을 띌 것 같았던 그 부드러운 사서의 얼굴에 모멸감이 비쳤다. 그녀의 머릿속에 사서=평민>거지>불가촉천민>심부름 대행소의 천민 계급구조가 만들어지고 있음을 파렌은 쉽게 예측했다.


“어이... 아까랑 360도 다른 그 태도는 뭐야.”


“하하 죄송합니다. 그보다 시작하려나보네요.”


“음?”


에린실은 다양한 연령의 인사들과 함께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정식으로 인계식이 시작된 것이다. 저기까지 갈 필욘 없겠지, 파렌은 팔짱을 끼며 투덜댔다.


“낡은 책 하나 받는 게 뭐 그리 대단하다고 저렇게 쇼들을 하는 건지.”


“그게 그렇지 않아요. 코덱스를 인계 받는 분이 대마법사 에린실님이잖아요. 어쩌면 여기서 코덱스 ‘재규명’이 이루어질지 모르니 개념을 확실히 하고 인계식을 치루는거죠.”


“...재규명이 뭔데?”


메르헨은 ‘그것도 모르냐’라는 의미가 분명한 시선을 보내며 안경을 고쳐 썼다.


“물리적, 마법적 혹은 자연적인 현상을 그 본질의 법칙까지 관여해 다시 규명 하는걸 말해요. 에린실 씨가 이룬 재규명의 대표적으로는 무음영창(無音咏唱)이 있어요. 마법의 시전을 위해서 주문을 외워야한다는 고착화된 현상을 탈피해서 주문을 외우지 않고 캐스팅을 하는거죠. 초대 대마법사인 조르딕 경께서는 비가 땅에서 하늘로 내리는 재규명을 선보이신 적도 있어요. 사실 이 정도 클래스의 재규명은 이미 마법이 아니라 기적에 가깝지만.”


“흠.”


파렌은 뒤통수를 긁어댔다.


“잘은 모르겠지만 역시 마법에 대해서는 별로 알고 싶지 않아. 마법은 소통하지 않는 학문이잖아. 마법사 수도 그 탓에 적고.”


메르헨은 당신이 그런 말도 할 줄 아냐는 얼굴을 짓다가 힘없이 웃었다.


“예, 뭐 그렇죠.”


코덱스는 3층 구석, 금서목록이 나열된 서재에 꽂혀있다. 어린애답게 어떠한 봉인을 해제하고 의식을 치러야만 뿅 하고 나타날 거라 예상했던 에린실은 약간 맥이 빠짐을 느꼈다. 겉으로는 조금의 티도 내지 않았지만.


구석진 서재로 가는 길에도 소녀를 둘러싼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귀에 맴돌았다.


“신앙은 위협 받으면 안됩니다!”


“코덱스의 학술적 가치는...”


“지금이라도 그만 두십시오! 그건 악마의...”


“다루기 힘든 물건은 그늘에 안치해두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사실, 들리긴 했지만 머리에 들어 오는건 하나도 없었다.


소녀는 코덱스에 전혀 관심이 없다.


지금 이 한걸음 한걸음도 열띤 목소리를 경청하는 태도도 모두 그에게서 비롯된다. 그가 깔아둔 카펫을 따라 걷는다. 서재의 책들을 손끝으로 스친다. 이 또한 그의 손길이다. 고서의 낡은 책표지들은 푸석푸석했다. 검은 눈동자가 제목들을 훑는다. 이것이 시대의 판단에 따라 강제로 묻힌 금서들의 목록이다.


[당신을 요구하는 태도]


[황제와 폐하의 차이]


[용족전쟁 여섯 번째 날]


[눈뜬 자 눈을 감으라]


[독을 마시는 새]


이윽고, 검은 표지의 황금색 술로 제목이 써진 책 앞으로 손이 멎는다.


코덱스.


소문만 무성하던 바로 그 책이다. 조르딕 경도 7페이지 이후는 넘기지 못하고 열렬한 독서광인 그가 단 하루 만에 반납했다던 그 책이다. 그리고,


안데르센이 가져오라고 했던 그 책이다.


마지막이 가장 큰 이유이고 소녀의 원동력이 되었다. 에린실은 단번에 책을 쥐었다.


끝까지 뭐라 지껄이던 이들이 경악했다. 아우성친다. 들리지 않는다. 외부의 볼륨은 0이 되었다. 가져다주자. 그는 기뻐할 것이다. 계속 사랑 받을 수 있다. 기쁨이 격앙 쳐 미소로 번진다. 안돼, 안돼. 자제하자. 아무리 기뻐도 웃음은 그 앞에서만 족하다. 에린실 로지니안은 천박히 웃지 않았다. 그녀는 언제나...


소녀의 눈동자가 커졌다.


코덱스의 바로 오른쪽, 또 다른 책이 꽂혀 있었다. 다른 고서들과 달리 볼품없다. 그다지 낡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그리 하찮음에도 소녀의 눈동자는 그것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정신을 차렸을 때 사람들이 자신의 팔과 어깨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그들의 목소리가 조금씩 들린다.


“에린실 씨 괜찮습니까?!”


“역시... 역시, 안됩니다. 그만두십시오.”


“함부로 쥐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당신이라도 금새...”


신경 쓰지 않았다. 소녀는 자신을 사로잡은 그 책의 제목을 읽었다.


‘리네의 일기장.’


마음속으로 뭔가 북받쳐 오른다. 소녀는 질문 했다.


“어째서, 어째서 이게 여기에...?”


코덱스를 놓았다. 에린실을 사로잡은 안데르센이 그 순간만큼은 없었다. 그리고 대신 그 일기장을 집었다. 심호흡하며 물러선다. 왜일까 뺨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이러면 안 되는데, 에린실은 울지 않는다. 그런데 왜 어째서.


수학의 정석을 내밀며 읽으라 권하는 메르헨 덕에 파렌은 혼수상태로 치닫고 있었다. 그때 파렌이 3층, 인계식이 치러지는 곳을 본 것은 거의 직감이었다. 오랜 경험으로 형성된 그 직감을 파렌은 신뢰한다.


파렌은 3층 난간 위를 한 번의 도약으로 올라섰다. 울고 있는 소녀가 보였다. 청년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다음 순간 까닭 모를 광풍이 몰아쳤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장작처럼 뒤로 날아가거나 쓰러졌다. 그들 중에 홀로 서서 울고 있는 소녀를 파렌은 천천히 두 팔로 껴안았다.


상투적인 말이지만 이보다 효과 있는 말을 파렌은 모른다.


“괜찮아.”


울음이 그친다거나, 고맙다 라거나, 하다못해 이거 놓지 못해! 라고 하던가. 그중 한 가지를 기대했다. 적어도 소녀가 진정했단 뜻일 테니까.


그중 어느 하나 이뤄지지 않았다. 대신 톤이 낮은 중저음의 남자 목소리가 대답으로 돌아왔다.


“아니. 그다지.”


눈앞이 폭발했다.


서재가 날아가고 찢어진 책들의 종잇장이 허공에 나울거렸다.


“크억!”


파렌은 필사적으로 압력을 버티려 했지만 무리였다. 어떻게든 에린실을 감쌌지만 충격에 밀려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종이들이 떨어지는 배경 속에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중절모에 긴 코트를 입고, 눈에는 은줄이 달린 모노클을 쓰고 있다. 한손에는 지팡이를 든 정형적인 신사였다. 지금 보인 이 행동이 과연 신사다운 것인지는 의문이 따르지만.


그의 다른 한 손에는 검은색 표지의 책이 들려있었다. 파렌은 이를 갈았다.


“코덱스를...! 네 녀석은!”


남자는 중절모를 벗어 한쪽 가슴에 두면서 허리를 숙였다. 깍듯한 인사였다.


“소개하지. 보잘 것 없는 본인은 Mr.안데르센이라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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