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9.01 07:41

심부름 대행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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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너만? 어째서 너만 그렇게 찬란한 거야?’


흑백 배경 속에 꼬마 소녀 둘이 나란히 손잡고 들판을 뛰고 있다. 둘 다 얼굴엔 미소가 만연. 하지만 한명의 가슴엔 아픔과 질투만이. 다른 한명의 맘속에는 미어짐이. 얼굴을 마주하지만 마음은 서로에게 등을 보이고 있다.


‘에린실은 좋겠어. 모두가 우러러 보아주니까. 나랑은 다르게’


그 말을 들은 소녀는 서글픈 표정을 짓는다.


상처는 마음의 채색을 얼룩지게 해 추억마저 지운다.


‘당신을 좋아합니다.’


소년 혹은 청년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렸다가 곧 사라진다. 누구를 좋아한다는 걸까? 나를? 아니면 너를?


소녀는 땀에 젖은 몸을 일으켰다. 베개 위로 고운 까만 머리칼이 쏟아졌다. 시트는 축축했다. 참을 수 없는 혐오감에 가슴을 감싸 안고, 곧 다시 쓰러진다. 살짝 떠진 눈엔 물방울이 맺혔다.


소녀의 이름은 에린실이다.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심부름 대행국의 국원은 크게 세 분류로 나뉜다.”


국장, 지스킬은 손가락 세 개를 펼쳐보였다.


“일반 잡무국원. 분리수거반. 쓰레기청소반. 분리수거반은 쓰레기와 그렇지 않은 것을 분류해서 따로 버리는 것이 주 업무다. 쓰레기청소반은 말 그대로...”


 


남자는 믿을 수 없었다. 단 두 명에게 조직 하나가 와해될 줄이야. 여기저기 불꽃이 피우고 시체에서 흘러나온 피가 땅에 고였다. 무기란 무기는 죄다 부서져서 폐품 신세로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멀쩡히 서 있는 건 남색 제복을 입은 두 남자뿐. 그중 색안경을 쓴 빨간 삐죽 머리 청년이 허리에 손을 얹고 실실 웃었다.


“헹, 이런 걸 양민학살이라고 하는 거지! 크하하하하!”


땅에 쓰러진 남자는 그들의 제복에 새겨진 마크를 보고 눈을 부릅떴다.


“네놈들, 소문만 무성하던 심부름 대행국의 클리너(Cleaner)들인가...”


“정답~”


어느새 다가왔을까 색안경 낀 청년은 죽어가는 남자의 머리를 잡았다. 신음을 흘릴 틈도 없었다. 파직 하는 소리와 함께 피가 청년의 뺨에 튀겼다. 손등으로 뺨을 닦고는 피 묻은 손등을 핥으며 청년은 즐거운 듯이 말했다.


“36kill 0Death~ 제널드, 이번에도 내가 이긴 거 같은데? 확인사살을 똑바로 해야지. 이 녀석 말대로 우리는 소문만 무성해야해. 한 놈이라도 살려 두는건 내 취향이 아니걸랑”


“음.”


큰 키의 남자는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살랑살랑 저었다.


 


“...말 그대로 청소 담당이지. 쓰레기를 대하는 빗자루가 마땅히 해야 할 행동이 뭐겠나? 망설임 없이 쓸어 담는 거지. 자비? 관대함? 청소부한테 가서 쓰레기에게 감정을 갖고 대하라고 말해봐. 미친놈 취급당할걸? 청소 담당은 그런 애들로 구성되지.”


지스킬은 쿡쿡 웃으며 설명을 끝냈다. 입 다물고 기다리고 있던 파렌은 소년 국장이 한손으로 얼굴의 반을 가리고 쪼개기 시작하자 대뜸 말했다.


“아니 근데 그걸 누가 물어봤다고 지껄이는 거죠.”


그런 파렌의 얼굴에 걸레가 날아왔다.


“네놈은 소설을 모르는군. 그러고도 주인공이냐!”


“갑자기 무슨 말이야!”


“에이잇! 됬어!”


지스킬이 손가락을 탁, 튕기자 이사벨라는 파렌의 몸에 담긴 쇠사슬을 풀어주었다. 무슨 도구를 이용 하는게 아니라 말도 안 되는 악력으로 쇠사슬의 매듭을 푸는걸 보고 파렌은 놀랐다.


‘언제 봐도 엄청난 괴력...’


소년은 척, 파렌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리고 너는 국원 중 몇 안 되는 분리수거 담당이지.”


“에헴.”


파렌이 콧대를 세우자 지스킬은 못 마땅한 얼굴을 지었다.


“멍청아. 니가 뭐 특별하거나 대단해서 그런 게 아니라 쓰레기 청소반 가기에는 전투력이 딸리고 잡무하자니 무력이 아깝고 그래서 어정쩡하게 배정된 거잖아.”


“알았수, 노인네 참 칭찬 한 번에 그리 인색할까.”


“주둥이 닥치고. 복귀했으니 바로 일하러 꺼져줘야겠다.”


지스킬은 서류 한 장을 집어 던졌다. 그걸 받아본 파렌은 익숙한 얼굴에 당황했다.


“이 소녀는...”


“응? 안면이 있나?”


파렌의 생애 첫 고백을 무시로 일관한 바로 그 소녀였다. 그는 서류에 포함된 긴 프로필을 읽기 시작했다. 지스킬은 몇 번 질문 했으나 집중한 파렌에겐 들리지 않았다.


‘에린실 로지니안. 이런 이름이었구나.’


의뢰인의 이름을 본 파렌은 과자에 다시 눈독을 들이고 있는 지스킬에게 물었다.


“Dr.안데르센? 이 사람은 누구죠?”


일할 때만이라도 자제해요 하면서 과자에 손이 가는 국장을 붙잡고 있던 이사벨라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안데르센이라구요?”


“그렇게 적혀 있는데요.”


뭐라 말하려 하는 이사벨라를 밀치며 지스킬이 말했다.


“못 들어봤나? 어린이 작가야. 어렸을 때 동화 한번 안 읽었나? 그래서 그렇게 지성이 부족했군.”


“지성이 부족할진 몰라도 댁처럼 칼슘이 부족해서 노망 난 어린애가 되진 않았수.”


“이사벨라! 저 새끼 죽여 버려!”


비서 아가씨는 한숨을 쉬며 책상에 서서 난리를 치는 국장을 강제로 앉혔다.


꼼꼼히 서류를 다 읽은 파렌의 눈이 이채로 빛났다. 그는 신음을 흘리며 참으로 안타깝다는 어조로 말했다.


“그런데 이거 실망입니다. 국장. 이 보고서에는 대상의 호위와 방문 이유. 기타 사항 같은 쓸데없는 건 잔뜩 적혀 있지만 가장 중요한 한 가지가 소실되어 있어요.”


“뭣?”


대행국의 정보를 총괄하고 있는 이사벨라는 무슨 소리냐는 눈으로 파렌을 쳐다봤다. 자신이 뭘 놓쳤다는 걸까?


파렌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국장에게 호소했다.


“이 보고서에는 대상의 쓰리 사이즈가 적혀 있지 않습니다!”


이사벨라는 허탈한 한숨을 쉬었다. 지스킬은 그런 파렌을 보며 분명 한심하다는 듯이...


“그, 그럴 수가... 그게 사실인가 파렌?! 이사벨라! 우리의 정보력은 이거 밖에 안됐나!”


“네놈까지 동조 하지마!”


그녀는 상사와 국원 폭행죄를 마구 성립하며 여성의 분노를 행사했다.


잠시 후 국장실의 문을 닫으며 파렌이 나갔다. 머리에 혹이 두 개로 늘어나 있는 지스킬에게 이사벨라가 물었다.


“또 무슨 짓을 꾸미는 겁니까?”


“글쎄.”


소년은 말없이 웃으며 군것질에 열중했다.


 


에린실 로지니안. 15세. 어린나이에 대마법사란 반열까지 오른 가히 천재적인 재능의 소녀. 11세에 마법학교를 조기 졸업한 후 171개에 달하는 마법적 현상을 재규명하고 세피로트의 열한 번째 가지를 1대 대마법사 조르딕 경 앞에서 직접 구현함으로써 그에게 명실공히 대마법사로 인정받았다.


“루시 녀석 마녀란건 이런 소리였나.”


에린실의 인생을 간략히 정리한 보고서를 읽으며 파렌은 인상을 썼다. 쓰레기 청소반과 그렇지 않은 자의 차이인가? 루시는 단번에 소녀에게서 범상치 않은 마력을 읽은 모양이지만 파렌은 짐작도 못했다. 그저 무뚝뚝한 소녀로 보았을 뿐이다.


“아무리 그래도 마녀가 뭐야. 암만 괴물 같은 애라도 애는 애인데. 잘 대해주면 그 차가운 얼굴도 조금은 녹아들...”


“길.”


“으엇?!”


어느새 호텔의 방문이 열려있었다. 에린실의 얼음 같은 시선이 파렌에게 꽂혔다.


소녀는 지난번과는 달리 까만 고깔모자에 로브를 걸친 마법사차림이었다.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소녀의 눈동자에는 불쾌한 감정이 어려 있었다. 파렌은 지금이 어제 난데없이 자기에게 고백했던 남자가 방문 앞을 지키고 있다는, 누가 봐도 남자 쪽이 나쁜 구도라는걸 알아차렸다.


“하하... 실은 말이지 의뢰를 받고 널 호위...”


“의뢰한적 없어.”


에린실은 냉랭히 대답을 하며 그를 지나쳤다. 뒤통수를 긁던 파렌은 보고서를 들어보였다.


“에... 정확히는 너 말고 안데르센인가 하는 사람인데 말이야.”


우뚝.


달을 도형화한 그림이 그려진 검은 로브가 흔들림을 멈췄다.


‘오오 과연.’


효과가 빠른 걸 본 파렌은 의뢰인이 소녀에게서 꽤 중요한 사람인 걸 짐작했다.


“안데르센 씨가 얼마나 사정사정하며 부탁하던지. 나도 원래 할 일 많은 사람이야. 하지만 어쩌겠어. 그렇게 간곡한데...”


단 한 조각의 진실도 담겨 있지 않은 말을 해대며 파렌은 속으로 낄낄댔다. 그것이 너무 과했을까? 에린실은 동행을 허락하는 대신 파렌에게 다가와 보고서를 낚아챘다. 소녀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 있었다.


에린실은 보고서를 잠깐 보더니 이내 그걸 끌어안으며 눈을 감았다. 그 모습에 놀란 파렌은 뺨을 긁으며 생각했다.


‘저 차가운 아가씨가 저런 얼굴을 보일 정도라니. 대단히 소중한 사람인 모양이지?’


파렌에게 뭐라 설명키 힘든 감정이 생겨났다. 아마도 좋은 쪽은 아니리라. 어느새 본연의 자세로 돌아온 에린실은 파렌에게 냉랭한 시선을 보낸 뒤 슥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다시 걷기 시작한다.


심지어 따라오라는 말도 없었다. 하지만 허락이 떨어졌음을 파렌은 알 수 있었다.


‘우와, 태도가 싹 다르네.’


Mr.안데르센과 파렌 린스타닌의 차이를 실감하며 소녀의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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