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부름 대행소

by 까마귀 posted Sep 01,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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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청년이 금발을 휘날리며 달리고 있었다.


누군가가 ‘당신의 직업은 뭔가요?’라고 묻는다면 파렌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세상에서 제일 천한 직업이지.”


골목길을 달리며 몇 번이나 커브를 틀었을까, 신문은 이제 마지막 한부만 남아 있었다. 전방에 보이는 집 안의 마당에 집어던지면 끝! 하지만 아직 안심할 수는 없다. 굳이 저 집을 마지막으로 남긴 것은 아까 그 배달부의 당부 때문이었으니까.


‘이봐 잘 들어. 저 집에 배달할 때는 맘가짐을 단단히 해야할꺼야. 저기엔 괴물이 살거든’


“하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포기할까 보냐!”


파렌은 가속에 박차를 가하며 집 앞을 지나는 찰나, 동시에 오른손의 신문을 담장 너머로 던지며 외쳤다.


“신문이요오오!”


이제 이대로 지나치면 의뢰완료. 그 순간 철문이 박살날 기세로 열리더니 괴성이 울렸다.


“안 본다고 했지이이이이이!”


파렌은 숙고했다. 분명 목소리는 톤이 높은 30대 중반 여성, 즉 아줌마라 추측 가능한데 왜 검은 형상의 불길한 오오라를 내뿜는 괴물이 뛰쳐나오는 걸까.


“히...히익!”


“신문 배달의 세계가 그리 호락 호락할거 같냐 애송아!”


의자 다리를 양손으로 붙잡은 채 휘두르는 것을 간신히 피했다. 강렬한 후폭풍이 뺨을 때리자 파렌은 기겁했다.


“아줌마! 날 죽일 셈... 꽥!”


의자를 피하자 시간차 공격으로 들어온 하이킥이 파렌의 안면에 정확히 꽂혔다.


 


“그래서 한부는 배달 못 했다는 거네요.”


“넵.”


얼굴에 신발 자국이 난 청년을 보며 남자는 씩 웃었다.


“그러니까 ‘심부름’을 못 했다는 거네요?”


“아니, 하하 그게 그렇게 되나... 그래도 그 집 빼고는 다 돌렸는데.”


파렌은 뒤통수를 긁으며 실없이 웃었다. 남자는 뒤로 크게 물러서고는 웃으며 말했다.


“하여간 심부름을 완수 못했으니 의뢰비는 못줘!”


“뭣?!”


물러선 만큼 달라붙으며 파렌은 남자를 윽박질렀다.


“그게 무슨 말이야! 신문배달부A 씨! 당신이 돌릴 신문을 내가 다 돌려줬는데 몇푼 안되는 의뢰비도 안 주겠다고! 같은 바닥에서 노는 인생 끼리 이거 왜 이래!”


도리어 남자가 격노했다.


“같은 바닥이라니, 씨파 너 같은 개천민 잔심부름꾼을 우월한 신문 배달부랑 동급 취급하지마라! 우오오오오!”


“크윽! 젠장 이것이 평민의 포스인가!”


기세에서 밀리며 천민 심부름꾼 파렌은 뒷걸음쳤다.


멀어져가는 남자를 보며 파렌은 한숨을 쉬었다. 그의 손바닥엔 달랑 1셀 동전 하나. 애초에 받기로 한 품값의 5분의 1 밖에 안 되는 액수다.


“후우... 내 인생은 왜 이 모양일까.”


청년의 이름은 파렌 린스타닌. 심부름 대행국에서도 가장 급이 낮은 잔심부름꾼이다. 심부름이란 말 그대로 잡일을 닥치는 대로 하는 것이 일상이며 개중에는 이렇게 남의 일을 대신해주고 품도 못 받는 일도 잦았다.


“저...저기.”


파렌이 벤치에 앉아 인생낙담을 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앙?”


그늘 깔린 얼굴로 쳐다보자 유약한 인상의 청년이 흠칫했다.


“저.. 심부름 대행국에서 일하시는 분이죠? 부탁할게 있는데...”


벌떡.


파렌은 초조한 듯 두 손을 마주잡고 있는 청년의 손을 잡아 올리며 말했다. 눈이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넵! 모든지 맡기십시오! 심부름꾼은 산타 할아버지와 같은 존재! 모든지 다 들어드립니다!”


물론 돈만 준다면야 드래곤인들 못 잡겠나, 파렌은 속마음을 목구멍으로 삼키며 밝게 웃어보였다.


“아.. 그래요 감사합니다. 그러면...”


청년은 수줍은 듯 뺨을 긁으며 한쪽을 가리켰다.


파렌은 여전히 미소 지은 채 청년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았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소녀의 모습이었다.


까마귀.


파렌이 처음 받은 인상이었다. 금방이라도 날개 짓쳐 까만 깃털을 떨어트리고 날아오를 것 같다. 긴 생머리에 블라우스와 치마는 모두 검은 일색이었다. 칙칙해 보이기 쉬운 패션이었으나 투명하기까지 한 하얀 피부에 예쁘장한 얼굴이니 몹시 잘 어울렸다.


다만 신경 쓰이는 것이 있다면.


선글라스를 쓴 두 정장 차림 남자가 좌우에 호위처럼 붙어 있는 그 소녀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지만 어쩐지 처량해보였다.


파렌은 그런 감정을 갖는 스스로를 비웃었다.


‘주인공이 가련한 여자애한테 사모의 맘을 품는다. 너무나 뻔한 설정이잖아. 이러다 나중에 고백이라도 하게 되는 거 아냐?’


그리 나중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청년은 용기 내 말했다.


“저... 저 대신 고백해주세요!”


파렌은 둔기로 머리를 맞은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청년은 어째선지 파렌의 마음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읽을 수 있었다.


‘이뭐병...’


“바보 같다는 건 나도 알아요! 하지만 당신은 심부름꾼이잖아! 뭐든지 대신해줄 수 있는 거잖아! 나, 나야 용기가 없으니깐.”


무어라 대답해야할까. 파렌은 이 청년에게 꽤 괜찮은 조언을 해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감동적이기까지 할 것이다.


“잘 들어 친구. 세상엔 남에게 맡길 수 없는 일도 있어. 바로 남에게 자기의 마음을 전하는...”


장광설을 할 것 같았던 파렌의 목소리는 청년이 내민 금화를 보고 작아졌다.


“자요!”


“참으로 용기 있는 결단을 내렸네. 친구.”


파렌은 금화를 집고 잽싸게 소녀에게로 뛰었다. 어째선지 뺨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제기랄... 나란 놈은!’


그는 직선으로 돌리다 잠시 옆으로 꺾어 장난감 장사꾼에게 갔다. 괴물가면을 하나 산 파렌은 곧장 쓰며 생각했다.


‘아무리 그래도 생애 첫 고백인데 쪽팔리게 맨얼굴로 어떻게!’


무료하게 서있던 정장 남자들은 이쪽으로 쇄도해오는 괴물가면을 보고 기겁했다.


“저... 저거!”


그들은 손을 뻗어 파렌을 저지하려 했다. 하지만 파렌은 유연하게 몸을 놀려 두 덩치의 손을 요령 좋게 피하곤 소녀의 앞에 섰다.


까마귀 소녀는 달리 표정 변화가 없었다. 가면에 꽂히는 시선이 유일한 반응이었다.


“이봐!”


가드들의 손을 뿌리치며 파렌은 마음을 정리하였고, 최대한 담담한 어조로 소녀에게 말했다.


“당신을 좋아한다고 해주러 왔습니다. 대답은?!”


그 이상한 말투에 두 남자는 뜨악했다. 소녀는 물끄러미 파렌을 보았다. 파렌은 아주 조금이지만 소녀의 눈동자에서 감정의 수면이 파문을 이는 것을 본 듯도...


그때 괴성이 들려왔다.


“이 변태 가면 녀서어어억!”


“꾸에엑!”


소년의 날라 차기에 정확히 옆구리를 맞은 파렌은 파충류의 비명을 지르며 옆으로 날아갔다.


베레모를 쓴 소년은 소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괜찮습니까? 치한은 제가 퇴치했습니다. 걱정 마시길.”


“누가 치한이냐!”


파렌은 다시 벌떡 일어나서 외쳤다. 베레모 소년은 지긋지긋하단 표정을 지었다.


“이 끈질긴 쓰레기 녀석!”


“루시! 너!”


“엇? 괴물가면! 어떻게 내 이름을!”


가면을 집어던지며 파렌은 악을 질렀다.


“나다. 이 자식아!”


소년의 눈이 동그래졌다.


“파렌 선배?”


“그래 임마!”


“역시 치한 맞잖아!”


루시는 바뀐 게 없다는 듯 외쳤다.


“우오오오오!”


파렌은 폭주하다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소녀와 일행은 이미 떠난 후였다.


“엇?! 아직 대답도 못 들었는데!”


루시는 베레모는 고쳐 쓰곤 물었다.


“그런데 왜 그 위험한 마녀한테 접근한 겁니까?”


“어이, 위험하다니. 넌 그 애한테 대쉬하지 않았나? 나를 보기 좋게 걷어차고 말이야.”


소년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야 아무리 위험해도 미소녀 앞의 파렌 선배만큼 지구를 위태롭게 할 건 없으니깐!”


“...넌 진짜 날 잡아서 쳐 맞는 수가 있어. 근데 마녀라고?”


그때 청년이 파렌에게 다가왔다.


“저기... 대답은 들으셨습니까?”


“에구 죄송. 보는 대로 얼음장 같던 여자애더군요.”


파렌은 어색하게 하하, 웃으며 청년이 자기 좋은 쪽으로 생각할 수 있도록 애매하게 말해줬다.


“그렇습니까... 하여튼 감사했습니다.”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청년은 멀어져갔다. 거절의 말을 직접 들은 것도 아니건만 실연의 아픔은 그것과는 상관없는 모양이다. 그 모습을 루시가 짧게 감상했다.


“바보네. 짝사랑도 고백도 심부름으로 해결되는 일은 아닌데.”


나이스, 금화 굳혔다! 하며 감동하고 있던 파렌은 의기양양이 말했다.


“물론 나도 그렇게 말해줬지.”


“그런 인간이 왜 가면 쓰고 달려들어서 대신 전해줬는데요.”


금화 하나에 첫 고백을 팔았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그야 저 녀석의 소심함에 답답해서 터프한 내가...”


루시가 말을 끊었다.


“닥쳐! 보나마나 돈에 눈이 돌아가서 허겁지겁 달려들었겠지!”


“대답을 안 들어도 내 캐릭터를 이해할거면 묻지도 마!”


옥신각신하던 둘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곧 싸움을 그만두었다.


“근데 넌 여기 왜 온 거냐? ‘심부름’하러 가야하잖아. 나 같은 잔심부름꾼에게 무슨 볼일 이지?”


루시는 베레모의 챙을 잡아내려 눈가를 가렸다.


“대장이 이제 그만 오래요.”


파렌은 한숨을 푹 쉬었다.


“빨리도 부르네.”


 


심부름 대행국이라 하면 별거 없는 시설과 별거 없는 인간들 별거 없는 일을 해주는 곳을 상상하는 일반인의 생각이 틀린 건 아니다. 왜냐면 ‘아주’ 틀린 거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트하일 대륙의 심부름센터가 여러 곳인 건 알지만 그 모두가 사실 연결되어 있는 하나의 조직인건 모른다.


돈만 받으면 거지의 수발도 들어야하는 잔심부름부터 국가 규모의 심부름을 하는 큰 심부름까지 완벽히 처리하는 그들의 능력은 사실 한참 예전에 회자 되는 게 정상이었으나 사람들이 회자하기도 귀찮아하는 워낙 천한 직종이다 보니 본의 아니게 암흑가의 은밀한 조직 같이 되었다.


그리고 그런 대단한 곳의 국장이 지금 뭐하냐면...


와삭, 와삭.


“여, 파렌 왔냐?”


“10분 전부터 여기 앉아 있었다. 화상아!”


과자를 쳐먹고 있었다.


파렌은 의자에 손발이 쇠사슬로 묶인 채로 억지로 앉혀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책상에 수십 종류의 과자를 쌓아놓고 깨작거리는 어린 소년이 있었다. 아무리 많게 봐도 열셋이 넘지 않을 것 같은 외모는 마치 천사 같이 아름다웠다. 파렌의 연한 금발과 달리 화사한 황금색 머리칼은 찬란해 보이기까지 했다. 누군가 날개를 달아놓으면 착각하는 사람이 분명히 있으리라 다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소년 옆에는 정장으로 빈틈없이 몸을 감싼, 수수한 갈색 머리칼에 안경을 쓴 이지적인 미모를 띤 여인이 안절부절 못하는 얼굴로 서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이사벨라로 소년 국장의 비서다.


소년은 과자를 입에 물고 우물거리며 말했다.


“웅, 냠. 그래, 두 달 동안. 쩝쩝. 일은(부스럭 부스럭) 어떻게 됬(바삭바삭)냐.”


아까부터 주먹을 부르르 떨던 그녀는 결국 소년에게 꿀밤을 먹였다.


“말을 할 땐 입에 자꾸 쳐 넣지 말구 말을 해!”


“흐엥.”


소년은 머리를 쥐어 잡고 책상 위를 마구 굴렀다. 파렌은 고개를 푹 숙였다.


“아주 잘들 논다...”


결국 그녀가 과자를 책상 한 모퉁이에 치워놓자 소년은 입맛을 다시며 파렌 쪽으로 걸터앉았다. 그리곤 싱글싱글 웃으며 반바지에 하얀 살갗이 보이는 두 다리를 산만하게 흔들어댔다.


“그래. 벌레보다도 지위 계층이 낮은 잡일 담당해보니 어때.”


“어떠긴 뭘 어떻습니까. 남의 신문을 대신 돌려주지 않나, 고백 좀 자기 대신 해달라고 시키는 놈이 있질 않나. 개고생만하고 의뢰비도 못 받는 일이 다반사요. 하루 세끼 값 벌기도 힘들었슴다.”


파렌은 생각도 하기 싫다는 듯, 고개를 연신 흔들며 말했다.


“하하 그러니까 내게 반하는 행동을 하지 말았어야지.”


“...그러고 보니 하도 개고생해서 까먹었는데 두 달 전에 내가 뭐 때문에 근신 처분을 받았죠?”


“응! 내 옆에서 의뢰 들으며 기웃대다가 과자 하나 집어먹었어!”


소년은 화사하게 웃었다.


파렌은 의자를 앞뒤로 흔들며 경련했다. 입에는 개거품이 물려있었다.


“생각났다! 너 이 자식 죽여 버릴 거야! 겨우 그딴 이유로! 그 고생을 시켜!”


“하하하하!”


“쳐웃지마!”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결국 이사벨라가 뒤에서 소년의 목을 조이는 것으로 상황은 일단락됐다.


여인은 눈을 살짝 찡그리고는 달래는 투로 파렌에게 말했다.


“파렌 군도 진정하세요. 뭐 이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니고 벌레 같은 피고용인 신분에 이제 익숙해질 때도...”


“에이잇! 당신도 닥쳐! 국장은 무조건 바보에 실질적인 사무는 2인자나 비서가 다 해쳐 먹는다는 상투적인 설정도 이제 지겨워!”


“이 새끼가.”


그녀의 발끝이 정확히 파렌의 안면에 꽂혔다. 코피를 흘리며 무너지면서도 파렌은 생각했다.


‘어...어쩐지 이거 데자뷰인거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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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관둔지 어느새 1년


 


그러나 결국 다시 쓰게 되는...


 


가벼운 글에 가벼운 마음으로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