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련소에서 만난 동기 중 한명이 89년생이었는데 서울예대 극작과였습니다.
서울예대 극작과하면 좋은 곳이죠. 그 형 말로는 당시 경쟁율이 6명 뽑는데 300명정도 왔었다고 하니까
대충 50 대 1 정도군요. 훈련 참 힘들었지만 재밌었던 건 역시 동기들이랑 생활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어쨌든 그 형은 순수문학을 하는 사람이었기에 저는 이것저것 많이 궁금 했습니다.
그래서 이야기도 많이 했구요.
우선 확실히 순수문학 하는 사람들은 자기들만에 자부심이 있습니다.
그 형 말로는 돈도 잘 못버는데 권위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냐더군요.
그 형이랑 지내다 보면 서울예대 들어가기 쉬운거 아니야? 라는 느낌이 들었는데
한가지 확실한건 그 형 머릿속에는 엄청난 량의 책들이 박혀있었습니다.
하루는 소설가 이야기를 하다가 김유정 소설가 이야기를 하게 됬습니다.
'봄봄', '동백꽃' 가은 작품이 대표적이죠.
그 형은 김유정 소설가를 엄청난 천재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동백꽃의 마지막 장면은 정말 좋다, 이야기도 재미있다. 라고 말하자
그렇기에 천재라고 하더군요.
대충 정리하자면 의미 있으면서도 재미있다는 것. 어떻게 보면 저는 장르문학 쪽에 서 있는 사람인데
둘의 공통점 중 하나는 역시 재미였습니다.
자, 이제 본론으로 가서 장르문학 하면 흔히들 흥미, 재미 위주의 소설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제 생각은 그보다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장르문학의 탄생은 순수문학 이후라는 겁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을 정의 할때 'post'의 뜻으로 몇가지로 분류하는 것 처럼
장르문학도 '그 이후', '뛰어 넘는' 등으로 해석하려고 합니다.
장르문학에서 흔히들 말하는 양산형 소설이라고 하는 것들이 탄생하는 원인은
저는 순수문학과 거리를 두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순수문학의 작품 들을 보면 정말 작가마다 각자의 개성이 확연히 들어납니다.
그 이유. 저는 지식의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좀 더 간단하게 말하면 독서량의 차이랄까.
서울 예대의 극작과 형의 말에 의하면 순수문학에서 인정 받기 위해서는
문학사에 기여 했다는 점을 꼽습니다. 즉, 발전에 대한 기여죠.
그것은 모방으로는 절대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형 또한 아무개(기어이 안나지만) 소설가에게
스스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했지만, 분명 자기만의 특색을 가지고 있을 겁니다.
양산형 소설에 비춰보면 그 소설들을 쓰는 장르소설의 저자들은 거의 장르소설만 봤다는 겁니다.
물론 장르소설도 처음에는 특색 있는 글들도 꽤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현재는 거의 대부분이 양산형소설들입니다. 이걸 보고 자란 사람이
소설을 쓰면 당연히 양산형 소설들만 많이 봐왔기에 그에 영향을 받아 양산형 소설을 쓰게
되겠죠. 악순환입니다.
글이 줏대 없이 흘렀습니다만,
결론적으로 하고 싶은 말은 독서의 편식은 양산형 소설을 낳게 하는 원인이며,
장르문학 또한 순수문학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 이 글의 주제입니다.
그렇군요 ㅎㅎ
독서에 편식이 되도록 없어야 한다는 데에는 저도 동의해요. 많이, 다양하게 읽으면 도움이 되는 건 분명합니다. 상당 수 사람들이 그렇게 이야기하더군요.
순수 문학의 장점은 예스맨님께서도 말씀하셨지만 '개성'에 있습니다. 흔히 생각하기에 장르 문학이 개성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오히려 순수 문학에 비하면 덜 개성적이지요. 순수문학이 상대적으로 도전적이고 진취적이기 때문에 종종, 장르 문학을 쓰려는 분들께도 좋은 자극을 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왜 순수 문학보다 장르 문학이 덜 개성적인가. 저는 그 이유를 독자에게서 찾고 싶습니다.
독자인 대중은 대개 새로운 것보다는 익숙한 것을 선호합니다. 백남준 선생님의 설치 미술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설명해 주어도 그것이 우리 눈에 익숙하지 않으면 대중은 거기에 습관적인 불쾌감을 내보입니다. 물건을 살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내용물이나 포장이 특이한 비누, 칫솔보다는 자신이 이미 써봐서 익숙한 비누, 칫솔을 사길 원하겠지요. 대중에게 어필하려면 익숙하고 친근해야 합니다. 따라서 대중에게 호소하는 장르 문학도 익숙하고 친근한 모습이 되어야 할 겁니다.
문제는 여기에서 출발합니다. 대중을 목적으로 한 장르 문학이 개성적일 필요가 있을까요? 대중에 어필하는 한에서는 개성적이어야겠지요. 하지만 동시에 친근하고 익숙한 모습을 띄어야 하기도 합니다. 장르 문학의 '장르'가 바로 소설의 친근하고 익숙한 측면이라고 생각합니다. SF라고 말하면 흔히 기대하는 모습들이 있고, 판타지라고 한다면 흔히 머릿속에 떠올리는 대략적인 그림이 있듯이, 책을 고르는 독자들에게 '이 책을 읽으면 이런 내용들이 나오리라 기대할 수 있어'라고 미리 신호를 보내는 것이 장르 문학이겠지요. 흔히 '장르 문법'이라고 말하는 부분들, 뻔한 클리셰나 기본적인 설정들은 지켜지되, 그 한도 내에서 개성을 보이는 것이 장르 문학이 추구하는 모습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기왕에 것 라이트노벨 얘기도 쓰겠습니다. 라이트노벨이 뭐냐, 라는 것에 대해 많은 의견이 있었지만, 제가 결국 납득한 주장은 이것입니다. 라이트노벨이란 대중을 위한 장르문학이다.
장르 문학 자체가 대중을 위한 것이긴 하지만, '장르 문법'에 충실한 결과 작가뿐 아니라 독자 역시 그러한 문법을 모르면 읽지 못하게 되도록 발전해 버렸습니다. 왜 판타지를 처음 읽는 사람에게 그토록 거부감이 큰 걸까요? SF소설은 어째서 그렇게 난해하고 복잡해 보이는 걸까요? 대중에게 친숙해 보이기 위한 장치였던 '문법'이 일종의 '불편한 개성'이 되어 버린 거지요.
라이트노벨은 10대 후반, 20대 초반 사이 연령대를 대상으로 장르 문학에 접근하는 일종의 입문서 역할을 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문법을 모르고도 장르 소설을 즐길 수 있도록 하자. 이러한 목표를 공유하는 것이 라이트노벨이라고 정의하는 것이 합당할 듯 합니다. 그렇지 않고선 이 잡탕 장르를 통칭해 설명할 길이 없기 때문이죠. 장르의 역사 역시 이를 뒷받침하고요. 일본의 한 소설 연재 사이트에서 판타지, SF 등 장르 게시판을 하나로 합치면서 라이트노벨이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리게 된 게 라이트노벨의 시발점이라는 이야기가 위키피디아에 나옵니다.
결론은 이렇습니다.
순수 문학을 읽어야 할 가치는 충분히 있다. 작가는 개성적일 필요가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르 문학에서 작가의 개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위험하다. 독자는 낯설고 위협적으로 보이는 작가의 개성에 회피적인 반응을 할 가능성이 높다.
이 정도로, 예스맨님 주장에 대해 어느 정도 보완을 하고 싶네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