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수 518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제가 쓴것 치곤 상당히 광속으로 썼습니다. ㅎㅎ


(대신에 퇴고를 못 했... -ㅁ-;;)


 


아무튼 예전부터의 고민이지만 어휘력이 너무 딸려 죽겠네요. ㅠㅠ


겨우 한화 동안에도 똑같은 표현을 죽어라 반복하질 않나... |||OTL


 



아쿠에리안에이지-Conflict for Break


 


==================================================================================================



sere1. 아귀가 맞지 않을 때의 행동 지침서(8)


 



마차가 다시 달리기 시작하자, 티젯시가 조용히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귀여운 비서를 두셨더군요.”


문득 경찰서 건물 앞에 그대로 놔두고 온 레릴의 일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지금은 레릴 때문에 나온 거였는데... 어쩌다보니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군. 뭐, 상관없지. 레릴의 일이야 지금 당장 어찌해야 할 문제도 아니니까.
만약 레릴이 안다면 서럽게 생각할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그는 자신의 비서가 지금 마을로 돌아올 일을 걱정하고 있는 처지에 놓였을 것을 아예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제가 따로 소개시켜 드릴 것도 없군요. 누군지 아시겠습니까?”


시선을 창밖으로 돌리며 티젯시가 대꾸했다.


“이름을 들으면 알아요.”


‘그럴 수도 있겠군. 성이 스티너니까.’


레릴의 조부 소렌 스티너가 생전 그녀와 두터운 친분이 있었다는 것은 그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니 자신과 함께 마을에 온 스티너란 이름을 가진 젊은이가 누구일지는 충분히 짐작 가능하고도 남을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소렌이 3년 전 세상을 떴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내가 말을 해 줘야 하나?


조금 망설이는 표정으로 킴은 맞은편에 앉아있는 티젯시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모르고 있다면 선뜻 꺼내기는 힘든 주제였던 것이다.


문득 티젯시를 바라보던 킴의 눈에 감탄의 빛이 서렸다.


‘그나저나 정말 지독하게도 변하지 않는구나, 이 사람은...’


그가 그녀를 알고 지낸 시간만도 얼마나 되었던가. 그러나 아직도 처음 만났던 그 때의 그 모습 그대로.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구김살 한 점 없는 매끈하고 갸름한 얼굴. 아직도 소녀티를 벗지 못한 동그랗고 큰 두 눈에, 칠흑 같은 검은 머리에는 아직 새치 한 올 보이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나이를 먹기는커녕 오히려 더 어려진 것 같기까지 하단 말야. 이거 왠지 나 혼자 늙어가는 기분이라 억울한데...‘


킴이 혼자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멍하니 창밖을 응시하고 잇던 티젯시가 중얼거리듯 덧붙였다.


“20년인가 벌써.. 그때 그 아기가 정말 많이도 컸네요.”


‘그때..?’
뭔가 방금. 그녀가 한 말은 분명 암시하고 있는 것이 있었다. 킴이 눈을 크게 뜨고 티젯시를 쳐다보았다. 혹시...


“알 고 계셨던 거로군요. 그분의 행방에 대해서..”


입가에 묘한 미소를 머금으며 그녀가 말했다.


“소렌의 유언장을 맡아두고 있었던 게 누구라고 생각하세요?”


유언장?
킴의 얼굴에 다시금 당황의 표정이 스쳤다. 3년 전, 그가 레릴을 맡을 당시 레릴의 아버지 버클리 스티너에게서 들은 이야기 중에는 그의 유언장에 관한 내용도 있었다.
레릴을 데리고 종적을 감춘 이후 줄곧 행방이 묘연하던 레릴의 조부 소렌 스티너의 갑작스런 사망 소식을 전해들은 뒤 며칠 후, 스티너가에 익명으로 전달되었다는 그의 유언장.
그렇다면 그걸 보낸 것이...


“..기자님이셨다구요?!”


작게 소리 내어 웃으며 티젯시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조금 어이가 없어진 심정으로, 킴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차창 밖의 풍경에서 시선을 떼고, 티젯시가 킴을 돌아보았다.


“어째서 말하지 않았냐고요?”


“버클리씨가 그간 얼마나 아버지의 행방을 찾고 있었는지는 기자님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하다못해 약간 귀띔이라도 해 주셨더라면..”


“야속한 일이죠... 하지만.”


잠시 말을 끊고 그녀는 느슨한 자세로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어떤 상황에서든 항상 여유 있어 보이게 만드는 어딘지 느긋한 저 모습도 실로 오랜만에 보는 것이었다.


“이유 없이 소렌이 그런 부탁을 하진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니까요.”


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킴의 입에서 작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킴에게 있어 리로트라젠이라는 인물은 언제나 막연한 존경의 대상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언제나 그녀의 판단을 존중하려고 생각해왔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소렌 스티너가 그의 본가가 위치한 아라크 슈도에서는 ‘미쳤다’는 소리를 듣고 있던, 난데없이 백작 작위를 내던지고 멀쩡하던 가문을 기울게 만들었던, 손주인 레릴을 데리고 나가 17년간이나 종적을 감추어 아들내외를 힘들게 했던, 그녀가 그의 행동들에 이유가 있다고 믿는다면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실도, 지금은 킴의 심경을 상당히 복잡하게 만드는 요소들 중의 하나가 되어버렸다. 다소 원망 섞인 목소리로 그가 중얼거렸다.


“...저도 그 정도로 믿어주신다면 기쁠 텐데 말입니다.”


동그란 눈을 더욱 동그랗게 뜨고 티젯시가 킴을 마주 쳐다보았다.


“왜 제가 당신을 믿지 못한다고 생각하죠?”


“아무런 언질도 없이 자취를 감추고는 이렇게 몇 년 동안이나 연락도 없으시니 말입니다.”


투덜투덜 대꾸하는 킴을 멍하니 쳐다보던 티젯시의 표정이 조금씩 일그러진다 싶더니 갑자기 일발의 괴한 웃음소리가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풋..!”


..풋?
순간적으로 킴의 양미간이 ‘꿈틀’하고 움직였다.


‘사람이 딴에는 심각하게 따지고 있는 건데 풋이라고?’


뭐가 그리 웃긴지 티젯시는 킴의 눈총에도 아랑곳 않고 연신 키들거리고 있었다. 잠시 후 찔끔찔끔 삐져나온 눈물을 닦아내며 티젯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군요. 미안해요. 나름 사정이 좀 있었습니다. 아무튼 정말 미안해요.”


약간이라도 그렇게 생각한다면 미안한 표정이라도 좀 지어주면 안된답니까..?


그러나 한껏 유쾌한 미소를 짓고 있는 티젯시의 얼굴을 보는 동안, 불쾌감과 원망의 표정을 띠고 있던 킴의 얼굴에도 어느새 서서히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사실 그녀에게 원망이나 늘어놓자고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자신을 믿는지 못 믿는지 추궁할 마음도 없었다. 단지 얼굴이나 한 번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 뿐.


헌데 어째서인지 뭔가 다른 이야기를 하려고 입을 열자, 마음과는 달리 그의 입에선 또다시 주절주절 불평의 말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게다가 6년여 만에 겨우 한 장 받은 연하장은 또 그게 뭐랍니까. 어디 공장에서 대량으로 찍어낸 듯 한 문구에다.. 하다못해 안부 한 줄 정도는 적어 주실 수도 있잖습니까.”


“...연하장?”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티젯시가 반문했다.


“얼마 전에 회사 쪽으로 보내신 그 신년 카드 말입니다.”


티젯시의 눈이 조금 가늘어졌다. 이윽고 그녀는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뜨리며 입을 다물어버렸다. 다소 의외의 반응이었기에, 킴은 조금 의아함을 느꼈다.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가 잠시 후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랬었나요....그랬군요..”


‘설마.. 기억도 제대로 못하고 있었단 말야?’


카드의 내용이 형식적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아예 기억조차 못할 줄이야... 킴의 얼굴에 처음으로 실망의 빛이 떠올랐다.


“그래도 전 리로트라젠 기자님과는 많이 친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여태 기자님의 이름도 모르고 있었군요.”


“이름..말인가요.”


티젯시가 고개를 들며 대꾸했다. 시선을 차창 밖 풍경으로 향하는 그녀의 입가에는 어느새 다시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어떻게 된 게 일하시던 신문사에서도 아무도 기자님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없더군요.”


“그렇겠죠. 말한 적이 없으니까.”


“..심지어 편집장님까지 모른다는 반응이구요.”


“그야 모를 테니까요.”


‘모를 거라고? 당연히 알면서도 가르쳐주지 않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진짜로 모른단 말야?’


킴의 머릿속에 이어 당연히 들어야 할 의문이 떠올랐고, 그는 티젯시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도대체 기자는 어떻게 되신 겁니까?”


뭐라 해석하기 애매한 웃음을 흘리며 티젯시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너무 많은걸 알면 곤란한데요. 신비감이 떨어지는 건 싫거든요.”


참으로 기가 차게 만드는 대답이었다. 킴이 어이없다는 듯 허허 웃으며 생각했다.


‘안 그래도 오만가지 미스터리로 똘똘 뭉친 사람이 별 걱정을 다 하시는군.’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그녀는 정말로 비밀이 많은 사람이다. 단순히 신비주의 전략을 쓰고 있는 건지, 아니면 정말로 말 할 수 없는 사연이 많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킴은 거의 본 적이 없었다. 그나마 리로트라젠이란 이름은 가명이 아닌 것 같아 다행이란 생각이 들 정도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사이 마차는 어느새 잔니아 마을 입구로 접어들고 있었다. 킴은 마부석으로 통하는 창문을 열고 젠블론에게 말했다.


“바로 숙소로 가지는 말게나. 일단 이분을 모셔다 드려야 하니까.”


“그럼 어디로 뫼실깝쇼?”


이번엔 티젯시가 킴이 열어놓은 창문으로 몸을 들이밀고 마부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제가 알려드릴 테니 그대로 가시면 됩니다. 일단 저쪽에서 우회전 하시고 그 다음엔..”



마차는 계속해서 티젯시가 알려준 길을 따라 달려갔고, 이윽고 그들이 도착한 곳은 낡은 소나무 울타리가 둘러싼 회반죽벽의 단조로운 형태의 집이었다. 저택의 크기에 비해 비교적 넓은 마당의 절반 이상은 크고 작은 널빤지들이 차지하고 있었고, 남은 공간으로는 여러 가지 모양의 톱과 망치 대패 등의 연장과 쐐기 같은 것들이 뒤섞여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가 알던 리로트라젠 기자의 이미지와는 전혀 매치가 되지 않는 저택의 전경에 킴은 순간 그들이 길을 잘못 든 것이 아닐까 의구심이 들었다.


“...정말 여기에 사시는 게 확실합니까?”


“왜요, 거짓말일 것 같은가요?”


티젯시는 그렇게 물으며 빙긋이 웃었다.


“아뇨. 조금...”


킴은 반사적으로 대꾸했으나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터라 내심 뜨끔했다.


마차 밖으로 내려가 지붕 위의 자전거를 내리고 있는 마부를 잠시 쳐다보고 있던 티젯시가 문득 킴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에드워드.”


어딘지 좀 전과는 다르게 사뭇 진지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난 단 한번도... 당신을 내 친구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적은 없습니다.”


그녀가 어째서 지금 이런 얘기를 하는 건지, 좀 이상한 느낌이 들었지만 확실히 듣기 나쁘지 않은 말이였다. 킴은 잠자코 입 꼬리를 조금 올리며 웃어보였다.
티젯시가 눈을 조금 가늘게 뜨고 그런 그를 쳐다보았다.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이윽고 그녀가 다시 입을 떼고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정말로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미안하다니, 미안하단 말은 아까도 하셨잖습니까. 굳이 지금 와서 표정까지 덧붙여서가며 재현해 주실 필요는 없는데요.
그렇게 생각하며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는 킴을 향해, 티젯시가 중얼거리듯 덧붙였다.


“..그건 잊지 말아줬으면 합니다.”


아마 그녀도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말도 없이 연락을 끊어버린 것에 나름대로 신경을 쓰고 있었던 모양이다. 걱정 말라는 듯 호쾌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킴이 인사를 건넸다.


“내일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마부 젠블론이 끌고 온 자전거를 건네받고, 마당을 가로지르는 그녀의 뒤통수에 대고 킴이 큰 소리로 우스개를 던졌다.


“설마 밤사이에 이사가버리시는 건 아니겠지요?”


고개는 돌리지 않은 채 왼손만 들어 까딱까딱 흔들어 보이며 티젯시가 대꾸했다.


“여건이 되면 그렇게 하죠-”



티젯시가 자전거를 세워 두고, 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잠시 지켜보다 이내 몸을 돌려 마차로 돌아가려던 킴이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뭐라 말하기 힘든 묘한 위화감. 그러나 방금 순간적으로 자신이 무엇 때문에 걸음을 멈추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 그는 한참을 멍청하게 서 있어야했다. 그러고 나서야 겨우 그는 자신이 줄곧 울타리 문 옆에 세워진 작은 우편함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회색으로 칠을 한 낡은 나무 우체통. 그 입구에는 흰 널빤지로 된 팻말이 하나 붙어있었고, 거기에는 큼지막한 글씨로 이렇게 새겨져 있었다.


-21번지.


‘21번지? 21번지라고? 4번지가 아니라?’


그 편지에 적힌 주소는 역시 잘못되어 있었던 것인가. 하지만 어째서..?


‘뭔가 이상해...’


그녀에겐 번지수만을 잘못 적어야 할 어떤 이유도 없다. 그냥 잘못 적은 것일 수도 있겠지만, 어딘지 석연찮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 킴은 한동안 애꿎은 팻말만 노려보고 있었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밤이 깊어진 시각. 어느덧 에튼시의 거리에도 사람들의 기척이 완전히 끊기고, 조용해진 거리를 이제 드문드문 서 있는 몇 개의 가로등과 곳곳의 건물에서 새어나오는 흐릿한 불빛만이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경찰서 건물의 1층 홀의 귀퉁이에서도 희미한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불빛 속에는 두 사람의 당직 경찰과 좀 전에 경찰서 건물로 들어왔던 레릴이 있었다.


“자, 자. 어디 한 번 패들 내 보시지.”


당직경찰 매튜가 특유의 얍삽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같은 테이블에 앉아있는 두 사람에게 약을 올리는 투로 말했다.
그의 맞은편에 앉아있던 당직경찰 제퍼슨이 잔뜩 구겨진 인상을 하며 쥐고 있던 1루페짜리 동전 몇 개를 탁자 위에 내던지듯 놓았다.


“에라이, 다 가져가라, 다 가져가!”


심각한 얼굴로 자신의 카드를 노려보고 있던 레릴도 잠시 후 낮게 한숨을 지으며 패를 내려놓았다.


“저도 진 것 같네요.”


주머니를 뒤적이며, 레릴도 동전 두 개를 탁자위에 올려놓았다.


“이거 너무 이기기만 하는 것도 재미없는데, 조금은 재밌게 해달라고, 이 사람들아.”


매튜가 히죽히죽 웃으며 탁자위에 놓인 동전들을 집어 올리자 제퍼슨은 ‘쳇’ 소리를 내뱉으며 고개를 돌려버렸고, 레릴은 매튜를 향해 멋쩍게 웃으며 대꾸했다.


“아직 여기 규칙은 적응이 안 되서 그렇죠, 몇 판 더 해보고 나면...”


낄낄 웃으며 매튜가 손을 내저었다.


“어림없지, 어림없어. 백년을 연습해 와도 무리일걸.”


제퍼슨이 ‘흥’ 코웃음을 쳤다.


“어림없긴 뭐가 어림없어? 어차피 이건 반은 운발인데. 어디 언제까지 승승장구하나 보자구 그래.”


“그러니까 어림없다는 거지, 이 친구야. 이 몸의 끝내주는 운발을 감히 누가 이겨?”


두 사람이 가벼운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여전히 주머니를 뒤적이고 있던 레릴이 곧 5페인의 지폐 한 장을 꺼내 쥐고 흔들며 두 사람을 향해 말했다.


“저 이제 동전은 다 떨어졌는데요.. 이거 바꿔주실 분?”


바꿔줄 사람이 없으면 동전이 떨어졌단 핑계로 이쯤에서 빠지고 적당히 구경이나 좀 하고 있다가 기회 봐서 구석 소파에 가 잠이나 잘 요량이었는데, 야속하게도 그의 속을 모르는 제퍼슨이 허허 웃으며 손을 들었다.


“이리 주게. 그거 내가 바꿔줌세.”


그렇게 말하며 그는 탁자 밑으로 손을 뻗어 두툼한 모직제의 자루 하나를 들어올렸다.
탁자에 놓일 때부터 잘그락거리며 심상치 않은 소리를 내던 주머니를 열어젖히자 레릴이 입을 떠억 벌렸다. 주머니 속은 온통 은빛으로 번쩍이는 1루페와 5루페의 동전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 사람, 매번 지기만 한다더니 판돈은 단단히도 준비해 왔잖아?’


보아하니 아예 밤새도록 판을 접지 않을 작정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이없다는 얼굴로 제퍼슨의 자루를 들여다보고 있는 레릴의 반응이 재밌다는 듯 매튜가 낄낄거리며 웃어댔다. 자루 속에서 동전 한줌을 집어 천천히 수를 세어가며 제퍼슨이 레릴을 향해 물었다.


“그러고 보니, 자네 내일 잔니아로 돌아가야 하는 거 아냐? 마차 잡을 차비는 있나?”


‘차비보다 내일 돌아가면서 사고 싶은 게 있었는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게 말해서 흥을 깰 수는 없었기에 레릴은 그냥 웃으며 대답했다.


“위태로울 것 같다 싶으면 전 알아서 빠질 테니까요.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듣고 있던 메튜가 고개를 절래절래 저으며 끼어들었다.


“무슨 섭섭한 말씀을. 이 친구가 이래 뵈도 그 ‘비번스’의 직원이라잖나. 비번스라면 그 뭐냐.. 그..”


“철도 말입니까?”


“그래. 맞아. 그 철도 공사권도 따냈겠다, 이제 앞으로 탄탄대로를 달리며 돈 쓸어 담는 일만 남은 회사 아닌가. 그런데 거기 직원인 이 친구가 무슨 돈이 아쉬울 일이 있어?”


제퍼슨은 매튜를 쳐다보며 혀를 한 번 끌끌 찬 다음 대꾸했다.


“정말 하나 생각하면 둘은 생각할 줄 모르는구먼. 그 돈 다 거기 사장이 벌지 이 친구가 벌겠나? 월급쟁이 월급이 거기가 거기지. 게다가 그거랑 지금 차비 걱정이랑 무슨 관계가 있어?”


매튜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수긍했다.


“흠- 그건 그래. 회사가 잘된다고 월급이 느는 건 아닐 테니까...”


레릴이 히죽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킴 사장님의 기분이 좋아져서 보너스라도 많이 주실까 기대는 해 보는 거죠.”


제퍼슨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이 친구, 보기보다 아주 약아 빠졌는데 그래..”


갑자기 매튜가 눈을 빛내더니 그가 탁자를 가볍게 치며 제안했다.


“그래. 말 나온 김에 자네 회사 얘기나 좀 들어봄세. 어떤가?”


“..예에엣?!”


레릴의 얼굴에 당황한 표정이 떠올랐다.


“왜 그동안의 활약상들 있지 않나. 신문이나 잡지 쪼가리에서 보는 것보다 회사 사람에게 직접 듣는 게 훨씬 자세하지 않겠는가?”


난처한 기분을 느끼며 레릴이 손을 내저었다.


“그래봤자 전 고작 비서직 3년차라 아는 것도 없고, 해 드릴만한 얘기도 없는데요.”


옆에서 듣고 있던 제퍼슨도 한마디를 거들었다.


“그럼 킴 자작에 대한 얘기라도 해 보게. 기사로만 읽는 거랑 직접 옆에서 보는 거랑은 많이 틀리겠지?”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레릴이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레릴에게서 무슨 이야기든 들어야겠다고 결심을 굳힌 듯 했다. 마지막 1페인 치의 동전 무더기를 마저 레릴의 앞에 밀어놓고, 제퍼슨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잠깐 예서 기다리고들 있어. 내 위층 사무실에 놔둔 좋은 게 있으니 가져오지.”


어리둥절한 얼굴로 레릴이 타박타박 층계를 오르고 있는 제퍼슨을 쳐다보자 덩달아 매튜도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술 가져온다는 말이지, 뭐겠어.. 나도 그럼 잠시 다녀오지.”


“어디 가시게요?”


“저 좀생이 같은 녀석은 말야, 안주도 없이 술만 진창 퍼마셔댄다고. 그러니 나라도 안주 될 만한 거릴 좀 가져와야지.”


몸을 풀려는 듯 팔을 휙휙 내두르며 2층으로 올라가는 매튜의 뒷모습을 쳐다보는 레릴의 입에서 피식 실웃음이 새어나왔다.


‘이 사람들은.. 명색이 경찰 양반들이 당직서면서 술이니 안주니 어디 꽁꽁 쟁여놓고 일하는 모양이지?’



위이이이이이-
덜컹덜컹-


두 사람이 위층으로 올라가고 주위가 조용해진 탓일까, 몰아치는 바람에 창문이 흔들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시끄럽게 들려왔다.


‘바다가 가까워서 그런가, 바람이 정말 세게 부는구나.’


이맛살을 조금 찌푸리고 레릴은 금방이라도 깨어질 듯이 심하게 흔들리는 유리창을 조금 불안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왠지 주위가 조용해진 탓도 있겠지만 바람의 강도가 실제로 점점 거세지는 느낌이다.


“.......가아...”


‘응?’


왠지 방금 바람소리에 섞여 사람의 목소리 같은 게 들린 것 같아 레릴이 귀를 쫑긋 세웠다. 그러나 귀를 기울일수록 바람이 부는 소리 외에 다른 소리는 없는 것 같았다.


‘..잘못 들었나?’


바람이 하도 요란하게 불어대니 순간적으로 목소리처럼 들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레릴은 고개를 돌려버렸다.


“........사이......다시 그.......”


말소리.. 분명히 말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는 다시 창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또다시 목소리는 사라지고 욍욍 몰아치는 바람소리만이 남아있었지만, 레릴은 이번엔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 쪽으로 다가갔다. 어쩌면 누군가 건물 밖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뿌옇게 서리가 끼인 창을 문질러 닦아가며 아무리 밖을 살펴보아도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환청인가..?’


분명이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탁자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기며 레릴이 생각했다.
어쩌면 위층으로 올라간 제퍼슨과 매튜의 목소리인지도 모르겠다. 가까이서 들렸다고 생각한 건 내 착각일 수도 있어.


‘창밖에는 분명 아무도 없고, 목소리 같은 것이 들릴 리 없어. 정신 똑바로 차리자. 그러면 되. 더는 들리지 않을 거야. 더는...’


콰앙-


갑자기 창문이 부서지는 듯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레릴이 흠칫 하며 고개를 돌렸다.
분명히 자물쇠가 단단히 걸려있었는데?


쉬이이잉~~


열린 창문으로 거센 바람이 밀어닥쳤다. 그리고..


다시 말소리가 들려온다. 더 가까이에서. 훨씬 시끄럽게, 그리고 사방에서 동시에.


“다가온다. 다시. 그게. 오고 있다.”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아니, 피할 수 없어. 결코...”
“죽을 거야. 모두 죽을 거야. 모두 죽을 거야...”
“가까이 있어. 점점 가까이.. 가까이에 있어.”
“조심하라. 조심하라. 조심하라. 조심하라. 조심하라...”


나직한 비명소리, 키득거리는 소리, 중얼거리는 소리, 크게 고함치는 소리, 수없이 많은 목소리들이 동시에 귓가에서 울려대기 시작했고, 레릴은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양손으로 귀를 막아버렸다. 소리의 정체가 뭐든 시끄러워 죽을 지경이었다.


몰아치던 바람이 잠시 멎자, 목소리들의 기세도 낮아진 듯 소리가 잦아들었다. 한숨을 돌리며 고개를 약간 들어 올리던 레릴은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열린 창문 앞에 무언가 희뿌연 형상이 서 있었다. 흐릿하게 잘 보이지 않았으나 분명 작은 사람의 인영.


‘뭐야, 환청 다음엔 환영? 이거 제대로 미쳐가는 기분이 드는데...’


회색빛 연기를 뭉쳐놓은 듯 한 그 형상은 잠시 가만히 서서 레릴 쪽을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이윽고 그것이, 마치 금방이라도 바람에 날아가 버릴 듯 일렁이는 두 팔을 서서히 들어올렸다.
순간적으로 그것의 두 눈이 붉게 빛나는 것이 보였다고 생각하며, 레릴은 마른침을 삼켰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잠시 후, 아래층으로 내려온 두 당직경찰은 창문과 문이 모두 열려 싸늘하게 식어버린 1층 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고 당황했다.


두 사람은 주변을 돌아다니며 레릴을 찾다가, 그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는 결론을 내리고 이번엔 경찰서 내에 없어진 물건이 있는지를 살피기 시작했다. 뭔가를 가져갈 만한 시간도 뒤진 흔적도 없었기에 당연한 일이지만 도둑맞은 것은 없었다. 오히려 제퍼슨이 세어 놓아둔 동전뭉치를 놔두고 가기까지 했고.. 더욱이 그 사이 강도가 들거나 한 것도 아닐 터라 둘은 의아함을 느꼈다.


결국, 그들은 마주 앉아 레릴이 회사 이야기를 해 주기가 죽도록 싫었던 것일지를 심각하게 토의하기 시작했다.


 


 

?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100 색채연가2 클레어^^ 2009.07.06 536 0
99 그 곳에서 덧없는인생 2009.07.06 564 0
98 연상기억법 7 . 1 연상달인 2009.07.06 587 0
» [에리얼파크 - 티젯시편] sere1_8 베넘 2009.06.28 518 0
96 나를 위하여 덧없는인생 2009.06.28 562 0
95 A creative duty 팹시사이다 2009.06.28 473 0
94 카오스-prolog~1화 막장외계인 2009.06.28 571 0
93 kanarossCharta prologue 쿠도 카시 2009.06.28 660 0
92 바퀴벌레[단편] 스밤 2009.06.28 667 0
91 리어랫피(Learretpy) Je 2009.06.28 567 0
90 [에리얼파크 - 티젯시편] sere1_7 베넘 2009.06.28 496 0
89 나는 정상인가 덧없는인생 2009.06.28 681 0
88 리어랫피(Learretpy) Je 2009.06.28 505 0
87 A creative duty 팹시사이다 2009.06.28 566 0
86 ~shy story~ file 샤이, 2009.06.28 490 0
85 ~shy story~ 1 file 샤이, 2009.06.28 494 0
84 ~shy story~ file 샤이, 2009.06.25 479 0
83 리어랫피(Learretpy) Je 2009.06.25 494 0
82 ~shy story~ file 샤이, 2009.06.25 484 0
81 진멸전쟁 ~시간의 왕~ 盡滅관찰자 2009.06.25 643 0
Board Pagination Prev 1 ... 211 212 213 214 215 216 217 218 219 220 Next
/ 220






[개인정보취급방침] | [이용약관] | [제휴문의] | [후원창구] | [인디사이드연혁]

Copyright © 1999 - 2016 INdiSide.com/(주)씨엘쓰리디 All Rights Reserved.
인디사이드 운영자 : 천무(이지선) | kernys(김원배) | 사신지(김병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