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게임 제작하다가 막혀서 이리저리 방황하고 있는 국산기름입니다. 스토리에 대한 잡생각을 주관적으로 풀어봤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중요합니다. 하지만 필수는 아닙니다.
우리가 게임을 하는 이유는 단순히 즐기기 위해섭니다. 다른 엔터테인먼트, 영화나 음악 등을 감상하는 것처럼 삶에 즐거운 자극을 주는 게 목적이죠.
그렇담 무엇이 게임을 즐겁게 만들어 줄까요? 단순히 생각해보면 당장 눈에 보이는 시각적 요소인 그래픽, 음악, 플레이 자체의 재미, 스토리 정돕니다. 그럼 이 요소 중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일까요? 애석하게도 그래픽입니다. 많은 유저들이 창조도시에 올라와 있는 모든 게임을 플레이해보진 않았을 것입니다. "산을 왜 오르느냐. 산이 거기에 있으니까" 라는 명언을 다들 들어본 적이 있을 겁니다. (명언의 쓰임새가 잘 못 된거 같다.) 하지만 유저는 제각각의 기준을 가지고 원하는 게임을 선별한 뒤 플레이합니다. 이 선별과정에서 가장 많은 영향을 주는 요소가 그래픽입니다. 서점에서 읽을 책을 고를 때 표지를 보고 고르는 것과 같은 이치죠.
그럼 유저에게 어필할 수 있는 요소 중 스토리는 얼마나 중요할까? 위의 요소 중 중요도를 큰 순서대로 나열하면 [그래픽>플레이 자체의 재미>음악>=스토리] 대략 이렇게 될 겁니다. 처음부터 스토리를 최중요 요소로 어필할 수 있는 비주얼 노벨 장르 쪽을 가야지 스토리의 중요도가 그래픽과 1, 2위를 다툴 수 있죠. 그렇지 않다면?(흠좀무)
이렇게 중요도가 낮은 스토리. 과연 애를 쓰고 훌륭하게 만들 필요가 있을까? 사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스토리 없이도 엔터테인먼트의 역할인 재미를 주는 게임은 수없이 많습니다. 마인크래프트가 그렇고 옛 플래시 게임인 똥피하기. 이외에도 많은 게임들이 스토리를 배제하더라도 플레이어에게 충분히 재미를 줄 수 있죠. (예시가 적은 건 제 좁고 옅은 게임역사 때문입니다. 죄송합니다 ㅠ)
그럼에도 게임을 제작할 때 스토리를 고려해야 하는 이유는 게임의 가치를 상승시켜주기 때문입니다. 게임을 하는 이유가 엔터테인먼트의 주 역할인 재미를 주기 때문이지만 더욱 파고 들어 왜 게임이 재미있나를 생각하면, 게임은 현실에선 처할 수 없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어 직접 체험하는데서 오는 쾌감이 재미를 주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게임 스토리는 다른 매체 보다 몰입하기 쉬워 강력한 역할을 합니다. 플레이의 재미가 떨어져도 약간의 스토리가 가미하면 게임의 특성상 플레이어는 충분히 게임에 몰입할 수 있는 것이지요.
만일 rpg만들기로 턴제 전투를 기가막히게 잘 만들어놔서 전투만으로 플레이어가 재미를 느낄 수 있다고 칩시다. 게임은 슬라임 10마리를 잡고 마지막으로 슬라임 킹을 잡으면 게임이 끝나게 됩니다. 플레이어는 슬라임 킹을 잡고 만족하며 게임을 끕니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잘 즐겼다 하며 다른 게임을 찾거나 할겁니다. 즉 다시 이 게임을 즐길 필요성을 찾지 못하는 거죠. 게임의 컨텐츠는 영원한 것이 아니니 플레이어가 다시 게임을 찾게 만든다는 게 좀 억지일수도 있지만, 무릇 제작자라면 자신의 창작물이 계속해서 사랑받길 누구나 원할 겁니다. 이를 해결하려면 더욱 재미있게 만들거나 (누가 방법좀) 다시 게임을 찾을 수 있게끔 다른 요소들을 게임 속에 집어 넣는 거죠. 이 다른 요소 중 가장 강력한 것이 바로 스토리입니다.
저만의 병일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게임을 끝낸 후 게임을 분석하길 좋아합니다. 이러이러한 요소가 잘 짜여져 있어 이 게임을 재밌다고 느꼈구나! 라고 생각하는 거죠. 이런 분석을 마치고 나면 끝낸 게임에 대한 흥미가 확 떨어지게 됩니다. 이 게임의 재미를 주는 구조가 어떻게 짜여져 있는 지 잘 알기 때문이죠. 훌륭한 스토리는 이러한 분석을 마치고 나서도 다시금 플레이를 하게 만들게끔 동기를 줍니다. 소설을 읽을 때마다 다른 감상이 나오는 것처럼 플레이어는 그 게임을 다시 함으로서 새로운 경험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럼 이 훌륭한 스토리는 어떻게 만드느냐! ……방법이 있다면 제보 부탁드립니다. (왜죠?)
하지만 우리가 만드는 것은 게임. 개떡같은 플레이와 개떡같은 스토리가 있어도 플레이어가 찰떡같이 몰입해주는 신비의 세계입니다. 훌륭한 스토리를 만들 수 없다면 개떡같은 스토리에 플레이어를 현혹시키면 됩니다. 제대로 된 전달법만 있으면 됩니다.
예시로 위의 슬라임 잡기에 간단한 스토리를 붙여보죠. 일단 기본형은 [슬라임 10마리랑 슬라임 킹을 잡아!] 입니다. 왜 하필 슬라임을 잡아야 할까요. 슬라임을 잡지 않으면 마을이 위험해 진다고 칩시다. 퀘스트 로그를 만들어 보죠.
"슬라임 10마리랑 슬라임 킹을 잡아. 잡지 않으면 마을이 위험해 질 거야!"
아직 뭔가 어색합니다. 좀 더 궁리를 해 살을 붙여 보죠. 슬라임을 잡지 않으면 마을이 왜 위험해 질까요? 슬라임 킹은 또 왜 잡아야 하는 건데? 슬라임은 특유의 몸 구조 때문에 주변 동식물들을 모두 썩게 합니다. 슬라임 킹은 그런 슬라임들을 주기적으로 양산해대죠. 그런 슬라임들이 모종의 이유로 마을로 접근하고 있다고 합니다. 보상 얘기도 빠트릴 수 없죠. 다시 퀘스트 로그를 만들어 보죠.
"슬라임 킹이 나타나서 주변의 동식물들을 모두 썩게 만드는 슬라임들을 양산하고 있어. 왠진 모르겠지만 이쪽으로 접근하고 있고. 이대로 가다간 마을이 위험해 질 거야. 슬라임들을 처치해주면 100골드를 줄게."
얼추 플레이어가 슬라임을 잡을 동기가 완성되었습니다. 아직 더 추가할 게 남았을까요? 아직입니다. 이제 저 부탁을 게임에 맞게끔 다듬어야 합니다. 플레이어는 현재 주인공이 되어 세계를 탐험하고 있는 거죠. 헌데 위의 문장은 대화가 아닌 통보입니다. 더욱 몰입시키기 위해선 위의 문장을 대화로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건 보통 마을을 대표하는 촌장이 부탁하겠죠? 촌장을 A로 주인공을 B로, 한번 대화문으로 만들어 봅시다.
A. "이봐. 거기 자네. 혹시 시간 좀 있는가?"
B. "왜 그러십니까?"
A. "아닐세. 자네한텐 너무 무리한 부탁 같구먼."
B. "괜찮습니다. 말해보십시오."
A. "사실 지금 우리 마을에 큰일이 생겼네."
B. "큰일이요?"
A. "슬라임 킹이 근처에 나타났네."
B. "슬라임 킹이요?"
A. "자네, 설마 슬라임 킹을 모르는 건가? 하긴. 나도 전설로만 전해 들었으니. 예전부터 슬라임은 어떻게 번식을 하는 가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었지. 슬라임 킹은 그런 논란 중에 하나였어. 거대한 슬라임 킹이 조금씩 조금씩 슬라임들을 만들어 낸다는 거지. 후…… 이제 우리 마을은 끝이구먼. 이대로 가다간 슬라임 때문에 올해 농작물들을 모두 썩어서 굶어 죽게 될 거야."
B. "걱정 마십시오. 제가 해결할 수 있습니다."
A. "그게 정말인가? 정말 다행이구먼! 자네가 슬라임 킹을 해치워 준다면 나도 더는 바랄 게 없지. 이 일을 해결하면 내 보수도 챙겨 주겠네."
자 이제 정말 완성이겠죠? ……아닙니다. (고만해 미친놈아.) 위의 대화 도중 촌장이 뜸을 들이거나 난감해 하는 걸 보일 수 있는 듯한 연출을 추가하면, 더욱 쉽게 촌장의 상황에 공감하고 동기부여가 되겠죠.
스토리를 전달하는 데 있어 주의해야 할 건 플레이어의 눈앞에 있는 게 책이 아닌 게임이란 겁니다. 책은 우리에게 옆에서 이야기를 해주는 존재이고, 게임은 우리를 게임 속 세상에 빠트리게 하는 겁니다. 게임 속에서 책에서 하는 것처럼 텍스트만 나열하지 말아주세요. 특히 스타워즈 오프닝처럼 텍스트만 천천히 올라가는 연출은 개인적으로 게임에선 끔찍하다고 봅니다. 플레이어의 바로 앞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세계가 떡하니 있는데 무엇하러 세계관 놀음을 글자로만 전해줍니까? 캐릭터들을 움직이고 말하게 해서 직접 스토리를 전해야지요.
스토리는 이외에도 제작진의 네임밸류를 형성하는 데 큰 기여를 합니다. 그래픽의 질적 수준이 일정하지 않은 우리 인디게임계에서 입소문의 효과를 가장 잘 타는 것도 스토리죠.
스토리는 필수가 아닙니다. 하지만 게임을 빛내기엔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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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가 뭔가 이상하긴 한데. 아무튼 잡설이었습니다. 혹시나 전부 읽어보신 분께 정말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