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평생 소원이었어. 얼마나 바라왔는지 알아?”
“항상 욕심으로 인하여 망하는 법이지.”
“헛소리 할 거면 당장 내려와!”
아카시아가 소리치자 다람쥐가 쪼르르 내려갔다.
‘후회는 무슨 후회! 일주일, 딱 일주일만 즐기고 미련 없이 가는 거다.’
아카시아가 생각했다. 너무나 흥분 됐지만 최대한 마음을 진정시키고 눈을 편안히 감았다. 그것이 가장 빨리 아침을 맞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해가 떴다.
벽에는 여러 만화 포스터가 붙어있고 책장에는 여러 만화의 캐릭터 인형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 만화 관련 물품들 못지않게 문제집도 많이 꽂혀있었지만 만화 쪽의 압도적인 승리가 예상되는 양이었다. 침대 위에 홀딱 벗은 여자가 없더라도 평범한 여고생의 방은 아니었다.
전 아카시아 (현 인간)가 눈을 떴다! 눈꺼풀을 꼼지락 거려봤다. 느껴졌다. 눈꺼풀이 서로 닿았다 떨어지는 것이 강력접착제를 붙이고 있는 두 합판처럼 강렬하게 느꼈다. 그녀는 발가락부터 온 몸을 조금씩 꿈틀거려봤다. 인간이었다.
인간이었다! 그녀는 순간 엄청난 희열과 함께 전신에서 식은땀이 나는 것을 느꼈다. 보통의 인간들이 잃어버린 줄 알았던 큰 액수의 돈을 찾았을 때 느끼는 것과 비슷한 것이었을까?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사태를 파악하기 시작했다. 어린 여자가 자신의 코 앞에서 자고 있었다.
‘누구지?’
아카시아가 의문을 가진 순간 그 미지의 소녀가 천천히 눈을 떴다. 소녀는 몇 번 눈을 깜빡이더니 눈을 크게 뜨고 벌떡 일어났다! 그렇게 멀뚱멀뚱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나잖아?”
‘얘가 지혜구나.’
전 아카시아가 침을 삼켰다.
자고 일어났는데 자신과 똑같이 생긴 사람이 앞에 자고 있다면 (전 아카시아는 깨어있기까지 했다!) 까무러치게 놀라기 마련이다. 전 아카시아는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마사카(설마) 유체이탈인가?”
소녀가 자신의 몸을 더듬으며 말했다.
‘응?’
처음 듣는 단어에 당황한 전 아카시아.
“이에(아니), 유체이탈은 아니지. 그렇다면 내 쪽이 벗고 있었겠지.”
‘무슨 말인지 물어봐도 될까?’
아카시아는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혹시 강한 충격에 미친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도플갱어인가.”
‘뭔데 또 그건?’
“아니지, 그렇다 해도 벗고 있을 이유가 없어.”
‘뭐지 당황하지 않네?’
“역시 외계인인가........”
지혜가 전 아카시아의 양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정적이 흘렀다.
“지혜가 밥 먹고 학교가야지!”
‘그녀다!’
전 아카시아가 생각했다. 16년 전 그 목소리였다. 애타게 기다려온, 끝내 들을 수 없다고 생각 했던 그 목소리.
“엄마! 오늘 개교기념일이라 학교를 안 가! 좀만 더 잤다가 독서실로 갈게!”
“음-. 지금 창문으로 보이는 저 교복 무리는 신기루겠지?”
“빠른 사막화. 이게 한반도의 현실이야 엄마.”
지혜가 진지하게 말 했다.
“그래 네 말이 맞겠지. 알아서 해라.”
그녀가 대꾸했다. 그것은 한탄이 섞인 푸념이 아니었다. 딸의 장난에 맞장구를 쳐주는 장난끼어린 어조였다. 학교에 하루 정도 빠지는 걸 용인할 정도로 그녀는 딸을 신뢰하고 있었다.
“너 말 할 수 있어?”
소녀가 진지한 표정으로 전 아카시아를 보며 물었다.
“아-.”
전 아카시아 소리를 내봤다. 처음 내보는 소리였지만 어렵지 않았다. 머리 속에서 ‘말을 하자.’라는 생각이 채 들기도 전에 소리를 낼 수 있다. 폐부터 시적해서 목구멍이 울리는 순간, 전 아카시아는 다시 한번 전율을 느꼈다.
“그런 것 같아.”
아카시아가 답했다.
“너 뭐야?”
지혜가 거침없이, 하지만 공격적이지 않은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다. 전 아카시아는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졌다. 한마디로 설명하기에, 자신은 너무 특이한 존재였다.
‘뭐라고 해야 하지?’
전 아카시아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한 그루의 아카시아가 자라기엔 너무 좁은 육면체의 공간이 딱딱한 시멘트로 둘러 쌓여있었다. 손으로(!) 바닥을 만져보았다.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메마름이었다. 전 아카시아가 소녀를 힐끗 쳐다봤다. 여전히 결연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빨리 말하지 않으면 소리를 지르겠어.”
아카시아는, 전 아카시아는 쌩둥맞게도 자신의 몸에 도끼가 박히고 톱이 들어오는 상상을 했다. 여성의 몸을 하고 있는 아카시아는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고 그대로 갈라졌다. 그녀의 배 단면엔 나이태가 그려져있었다.
“전부 말할게.”
어차피 말주변이 없었던 전 아카시아였다. 또, 인간 사회는 자신 앞에 있는 소녀가 훨씬 선배일 것 아닌가? 거짓말이 통할 리 없다고 생각한 전 아카시아였다.
말했다. 전 아카시아가 전부 말했다.
“혼또니(정말)?”
“응?”
“정말이냐구.”
“믿기 힘들겠지만, 맞아.”
“그렇단 말이지.”
소녀는 찬찬히 전 아카시아를 살폈다. 영락없는 자신의 모습이었다. 약간 짧은 엄지 발가락부터 두꺼운 눈썹까지, 완벽한 자신이었다. 거울에서도 본 적이 없는 완벽한 자신의 모습은 엄청난 비현실감, 이질감, 환상적인 느낌까지 주는 것 같았다. 이 상황이 누군가의 정교한 연출로 만들어졌다기엔 지구의 과학기술이 많이 부족하다, 지혜가 생각했다.
“좋아.”
지혜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네가 아카시아의 요정이다, 그 말이지?”
“음-. 나는 그냥 아카시아고 요정....... 그래, 요정 같은 것이 나를 인간으로 만들어 준 거지.”
잔뜩 긴장한 전 아카시아가 지혜의 질문에 퍼뜩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