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2.15 02:35

[단편]머리카락

조회 수 423 추천 수 3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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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무렇게나 기른 머리가 왠지 답답해 보여 머리를 잘랐어. 특별히 원하
던 모양이 있었던 게 아니라 대충 정리만 했는데도 생각보다 깔끔해 보여
다행이야. 참 이상하지? 매일 같이 보던 나인데 머리길이 하나 달라졌다
고 내가 낯설어 보여. 마치 나를 구성하고 있던 중요한 부분이 떨어져 나
간 것 같아.

 

 2.
 내 방에 계속 있다 보면 가끔씩 견딜 수 없을 만큼 숨이 막힐 때가 있
어. 폐소공포증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럴 때는 창문을 열고 청소를 하며
답답함을 해소하곤 해. 물건을 정리하고 먼지를 털어내다 보면 굳이 내가
목욕하지 않아도 마음까지 씻기는 것 같거든. 청소를 하면서 가장 구질구
질해 보이는 건 한 때 나의 일부분이었던 머리카락이야. 참 이상하지? 단
지 내게서 떨어져 나갔을 뿐인데 너무 지저분하게 느껴져. 어쩌면 사람들
은 떨어져 나간 자신의 일부에서 스스로의 추잡한 모습을 떠올리는 건지
도 몰라.

 

 3.
 청소를 끝내갈 때 쯤 내 것이 아닌 머리카락을 발견했어. 갈색 빛을 띠
는 긴 머리카락. 윤기를 잃고 바싹 말라 비틀어졌지만 누구의 것인지 짐
작하기 어렵지 않아. 청소를 멈추고 네 머리카락을 멍하니 쳐다봤어. 기분
이 너무 이상해. 너랑 헤어진 지 벌써 꽤 됐는데 아직도 너의 흔적이 내
방에 남아 있어. 참 이상하지? 고작 한 가닥의 머리카락일 뿐인데 한참을
바라보며 널 생각했어. 마치 네 머리카락이 너인 양 손에 쥐고 바보같이
울었어. 네가 남기고 간 머리카락처럼 나도 너한테서 떨어졌구나.

 

 4.
 우울함을 달랠 겸 시내에 나갔다가 우연히 널 봤어. 네가 쳐다보기 전에
얼른 다른 곳에 숨었어. 이런 날이 오기를 그토록 바라며 기다렸는데 막
상 널 보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무 생각도 안 나. 나도 모르게
널 피하는 내 모습이 한심해 보여. 내가 뭘 잘못한 것도 아닌데. 머리 속
에는 수십 가지 생각이 떠올랐지만 난 그저 널 멍하니 널 쳐다볼 수밖에
없었어. 내가 사랑했던 네 아름다운 모습의 흔적을 아직도 너에게서 찾을
수 있는데 짧게 잘라버린 네 머리가 너무 낯설게 보여. 참 이상하지? 너
랑 나는 이미 헤어졌는데 나는 그제야 우리가 완전히 끝났단 걸 알게 되
었어.

 

 5.
 짧게 잘라버린 머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자라 예전의 모습을 찾을
테지. 너무나도 사랑했던 너의 길고 풍성한 생머리. 네가 다시 그 모습을
되찾을 때쯤 우린 다시 시작할 수 없을까? 머리가 자라나듯 우리 마음은
다시 자랄 수 없는 걸까?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너무나 낯설어 보여. 소중한 무언가를 잃은 것만
같아.

 


==================================================================
 방 청소 하다가 여자친구 머리카락이 하도 많아서 짜증내다가 씀.

Who's yars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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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망상은 한계가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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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rofile
    Yes늙은조카Man 2012.12.15 02:56
    나도 내 방에 여친 머리카락 많았으면 좋겠다...
  • profile
    yarsas 2012.12.15 03:30
    어머님의 머리카락으로 채우셔도..
  • profile
    윤주[尹主] 2012.12.15 09:14
    머리카락 한 올로 발전, 전개시킨 이야기가 이렇게 흥미진진하네요 ㅎ 잘 봤어요.
  • profile
    yarsas 2012.12.15 17:13
    발단은 청소였죠 ㅎㅎ
  • profile
    yarsas 2012.12.15 18:57
    앗 용작 님이 제 글에 댓글을! 영광이군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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