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본 장소] 제주공항에서

by 윤주[尹主] posted Dec 03, 2012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도착하고 나면 내가 탄 비행기는 거의 항상 활주로 한가운데 있었다. 한두번 승강교를 이용해 본 적이 있긴 했지만, 대개 경우엔 비행기는 활주로 가운데서 승객들을 부려놓았다. 그러면 공항 건물에서 커다란 저상 버스가 한 대, 혹은 두 대 그 앞에서 정차해 여객기가 내려놓은 승객들을 실고 건물까지 움직이곤 했다. 여러 차례 왕복하며 승객을 실어 나르는 버스는 매번 사람과 짐들로 북적북적했다.

 버스가 활주로를 건너 건물 앞에 멈추면 사람들은 일제히 내려와 건물 안으로 향했다. 보통 입구 옆에선 이상하게 생긴 차량이 수화물을 나르고 있었다. 공장이나 생산 설비를 연상시키는 커다란 카트 같은 짐칸을 뒤에 매달고, 그에 비해 왜소해 보일 만큼 작은 조종석이 앞에 있는 차량이었다. 조종석 옆에는 컨베이어 벨트가 달려 실고 있는 수화물을 내려놓는 데 사용하는 듯했다.

 언제부턴가 들어가는 입구 앞에는 약품 처리가 되어 있다는 붉은 매트가 깔려 있었다. 공항 건물을 통해 섬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은 모두 그 매트를 밟고 지나갈 수밖에 없었다. 매트는 때로는 젖은 것처럼 보였지만, 때로는 말라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늘 곁에 있는 안내문에는 병원균 유입을 막기 위한 소독약 처리가 되어 있다고 쓰여 있었다.

 입구를 통과해 특색 없는 하얀 복도를 지나면 수화물을 찾는 방이 나왔다. 방이라기보다 커다란 홀이라고 해야 할 그 공간엔, 타원 모양인 컨베이어 벨트 세 대가 나란히 설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컨베이어 벨트 각각 위에는 마치 지하철 플랫폼에 설치된 것과 같은 전광판이 있어서, 벨트에 실려 나오는 짐들이 어디서 온 것인지 띄워 주었다. 타원 컨베이어의 대부분은 그 홀 안에 있었고, 일부는 건물 밖으로 삐져나와 있었다. 밖에서 수화물을 벨트 위에 내려놓으면 회전초밥집 테이블처럼 벨트가 움직여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 화물을 알아서 찾아갈 수 있게 되어 있는 구조였다. 어릴 적엔 가끔 거기서 짐을 찾아 대합실 안으로 들어가곤 했다. 하지만 어느 정도 크고 나서부턴 각자가 짐을 챙기면서 수화물로 따로 맡기지 않고 탑승시부터 각자 챙겨 다니는 경우가 많았었다.

 그 커다란 홀을 통과해 대합실로 들어서면, 얼굴도 알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 시선과 맞닥뜨리게 된다. 모두 누군가를 맞기 위해 온 사람들이, 어떤 사람은 팻말을 들고 있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누군가의 이름을 연호하기도 했다. 그 기세에 눌려 시선을 깔고 빠른 걸음으로 휘적휘적 그 사람들을 지나치면 그제야 주변 낯선 풍광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렌트카 부스와 기념품점, 등 뒤에 있는 커다란 전광판 등등. 대합실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위해 틀어둔 TV를 흘깃거리며 회전문 밖으로 나가면 기포라도 인 양 구멍이 숭숭 뚫린 검은 돌을 벽돌처럼 네모 반듯하게 잘라 붙인 듯한 보도블럭을 밟게 된다. 야자수 같은 낯선 가로수, 풍력발전기인 양 멋대가리 없는 풍차들. 건물 왼편 보도블럭에 접하여 대기 중인 좌석버스들이 손님들을 받고 있다. 시내 각지 호텔 몇 곳을 돌다가 도시를 빠져나가 서귀포와 중문으로 향하는 좌석버스가 거기에 있다. 목적지까지 가려면 그것을 타고 중문까지 향한 뒤, 다시 택시 등을 바꾸어 타고 얼마간 더 들어가야 한다. 대합실을 거쳐 밖으로 나오면, 그제야 나는 여기가 제주도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비행기를 타지 않게 된지 벌써 수 년이 지났다. 언제부턴가부터 약 10여년 간은 여객선을 이용했고, 최근 몇 년간은 아예 제주에 내려가 본 경험이 언제가 마지막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다.

 어릴적 보았던 공항 풍경이 이제는 가물가물해지고 그나마도 일부만이 기억에 남을 뿐 당시 인상이나 느낌 따윈 생각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가끔 머릿속에서 떠올린 풍경에, TV에서 나오는 장면에 반가움을 느끼는 걸 보면, 경험이란 게 그리 쉽게 잊혀지지 않는 거란 말이 맞기는 한 모양이다. 비록 그게 완전히 정확한 형태는 아닐지라도 말이다.

 최근엔 색다른 경험을 해본 적이 별로 없다. 바쁘기도 하고, 자기 분수에 알아서 몸을 사리다보니 낯선 일을 하는 걸 꺼리게 된다. 나중에 내가 커서 지금 20대 추억을 떠올리려 하면, 생각날 법한 일은 얼마나 될까? 추억할 만한 얘깃거리 하나 없이 그저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는 건 아닐까?

 새삼 두려운 마음이 일고 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