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7.11 15:33

나와 그녀의 생존전략 3화

조회 수 357 추천 수 1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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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반이라는 여자가 다시 손에 든 것을 높이 쳐들었다. 멍청히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나는, 여자가 움직이는 걸 보곤 정신을 차려 재빨리 몸을 빼어 허겁지겁 달아났다. 등 뒤에서, 무언가 쾅 하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힐끗 돌려보니, 여자가 내려친 자리 아스팔트가 산산조각이 나 사방으로 흩어져 있었다.


 상식적이지 않다, 그런 이성적인 판단에 앞서 위기감이 온 몸을 휘감았다. 저런 걸 한 대라도 맞았다간 진짜로 죽고 만다!


 내가 거리를 벌여놓자, 여자는 잠시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았다. 가로등 불빛에 드리워진 그림자 탓인지, 여자가 쓴 방상시 탈이 험악하게 인상을 찌푸린 것처럼 보였다. 곧 여자가 낮게 읊조리는 소리가 고요한 심야 공기중에 퍼져나갔다.


 "형리는 지엄하신 국법을 받들라."


 그것이 무슨 선고였을까. 일순간 주위 공기가 싸늘해졌다. 나는 무심코 발걸음을 멈췄다. 꽤 거리가 멀어졌는데도 여자는 쫓아올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럼에도 나는 그 여자에게서 뿜어져나오는 살기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표정도,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 그 직장인 차림 여성에게서 말이다.


 여자는 다시 낮게 읊조려 말했다.


 "형리는 대명률에 따라, 저 자에게 곤장 세 대를 쳐라."

 "예이~."


 어디선가 여자의 말에 호응하는 소리가 났다. 소리가 난 곳을 향해 몸을 돌렸다. 무언가가 어둠을 가르며 내 쪽으로 날아들고 있다!


 "!!"


 판단하기 전에 몸이 먼저 움직여 자리를 피했다. 뒤이어 쾅, 소리와 함께 시멘트 벽에서 먼지가 뿌옇게 일었다. 황당하게도, 담벼락을 박살낸 건 나무로 만든 곤장이었다. 민속촌 같은 데서 흔히 보던, 넓고 길죽한 나무막대기 말이다. 벽에는 그런 곤장이 세 개나 쳐박혀 있었다. 어안이 벙벙해 있는 사이, 여자의 다음 말이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형리는 대명률에 따라, 저 자에게 압슬을 시행하라."

 "예이~"


 머리위로 까닭없이 그늘이 진다 싶어서 고개를 들었다. 책상 상판만한 넓이의, 묵직한 바윗덩이가 거기에 있었다.


 "뭐야, 이게 대체!"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자, 바윗덩이는 그대로 내 위로 떨어져내렸다. 뒤늦게 상황을 이해한 나는 그 자리에서 최대한 멀리 달음박질쳐 달아났다. 등 뒤에서, 계속해 바윗덩이들이 떨어져내리는 굉음이 연달아 들려왔다.


 "으아아아아아악!"


 그렇게 빨리 뛰어본 건 초등학교 운동회 이후 처음이었다. 등 뒤에서 땀이 비오듯 흐르고, 질끈 감았다 뜬 눈엔 눈물인지 뭔지 모를 습기가 차 시야가 뿌옇게 보였다. 무서웠던 건, 그렇게 도망치는 와중에도 귓가에선 계속해 그 미친 여자 목소리가 맴돌았단 사실이다.


 "형리는 대명률에 따라, 저 자에게 주리를 틀어라."

 "예이~"

 "야 이 시팔!"


 긴 장대 같은 막대기들이 우수수 떨어지는 것을 피해 도망치다보니 어느새 한강변에 도착해 있었다. 인적이라곤 없는 강변 둑길을 따라 정신없이 도망치다가, 발끝에 돌부리가 채여 꼴사납게 넘어져 버렸다. 돌아보니 도깨비 여자는 바로 근처까지 쫓아와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더이상 여자에게서 도망칠 수 없었다.


 "왜 그러지?"


 더이상 반항하려 들지 않는 내가 이상해 보였는지, 여자는 내게 물었다. 당연한 것이다. 조금 전까지 죽어라고 도망쳐 놓고선, 이제 와서 체념한 양 있으니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여기는...


 "그 얘는 여기서 죽었어."

 "갑자기 무슨 얘기를 하느냐?"

 "...여기가 내 여자친구에게 마지막 장소였다고."


 사실 공교롭다고 할 것도 못 되었다. 그녀가 죽었던 날, 나와 그녀가 관계가졌던 날, 우리는 충동적으로 그 짓을 했다. 장소는 그다지 상관없었다. 그저 그 늦은 시간에 사람 눈을 피할 수 있는 으슥한 곳이면 아무래도 좋았다. 집에서 가까운, 그늘진 강변 다리 아래 사각으로 우리가 향한 건,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였다. 돈도 없고 아직 학생인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여지는 그리 많지 않았으니까. 저 미친 여자를 피해 여기로 도망쳐온 것도, 그저 집 골목에서 가까웠기 때문이다. 다른 의미는 없었다. 하지만 끝내 도착한 곳이 바로 여기가 아니었더라면, 나는 좀 더 살려고 꼴사납게 발악했을지도 모른다.


 "하하, 우습네. 어째서 그렇게 죽기살기로 도망쳤을까? 살아봐야 별 거 없다고, 죽은 여자친구를 뒤따랐어야 했다고 그렇게나 생각해놓고선."

 "네 사정 따위 알고 싶지 않다."


 내 말에 여자는 차갑게 대응했다.


 "난 그저 너희 인간의 그 생명이란 걸 지독히도 가지고 싶을 뿐이다."


 여자가 쓴 방상시 탈이, 그 네 개의 커다란 눈들이 나를 노려보았다. 여전히 탈 아래 여자의 표정은 읽을 수 없었다. 그건 못내 아쉬운 일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인간을 죽이는 사람의 얼굴은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싶었는데. '생명이란 걸 지독히도 가지고 싶을 뿐'이라고 말하는 사람의 표정은 어떤 건지 궁금했는데.


 '강'과 산왕 부하들의 싸움은  TV 중계로도 자주 봤지만, 저들의 맨얼굴을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아니, 딱 하나 얼굴을 본 적 있는 자가 있다. 내 여자친구를 죽인 그 녀석,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그 '산왕'이라는 작자 본인만은 여친이 죽은 그 날 분명 본 기억이 있다. 하지만 어째선지 기억 속 녀석의 얼굴은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다. 왜일까? 정말 의사가 말한 것처럼 정신적 충격을 받은 탓일까? 아니면 녀석들이 기억을 지우는 마법이라도 부린 걸까?


 자포자기한 내게 여자는 손을 뻗었다. 나는 저항하지 않고 고개를 살짝 들었다. 여자의 손이 금방이라도 내 목을 움켜쥘 것처럼 보였다. 나는 눈을 감고 죽은 여자친구를 생각했다. 혼자 외로웠지, 오빠도 이제 따라갈게. 그러니까 이젠 둘이 영원히 함께야.


 똑.


 정수리에 차가운 물방울이 떨어져 나도 모르게 눈을 떴다. 어째선지 여자는 아직 내게 손을 대지 않고 있었다. 방상시 탈의 네 눈은 내 머리 위 어딘가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거기에 대체 뭐가 있다고? 무심코 고개를 들자, 돌연 작고 새하얀 무언가가 콧잔등을 때렸다.


 "어?"


 세게 얻어맞은 건 아니기에 다시 고개를 들려 했다. 역시나 똑같은 것이 머리를 짓눌러 위를 보지 못하게 한다. 아까보단 좀 더 힘이 실려 있었다.


 "뭐냐, 너는 대체..."


 여자의 말과 함께, 상대는 내 곁으로 천천히 하강했다. 하강? 머리 위 허공에서 나타나 느긋하게 내려와 발을 지면에 대었으니 차라리 강림이라고 해야 옳을지도 모르겠다. 그제야 난 상대를 바라볼 수 있었다.


 화사한 색동저고리를 입은 어린 여자아이다. 하얀 버선에 머리에 올린 아얌과 아얌드림까지, 본격적으로 차려입은 한복 복장이었다. 조금 전까지 나는 이 녀석에게 발길질당하고 있었던 걸까? 버선발을 유심히 보면서 좀 전에 녀석이 콧잔등을 때린 일을 생각하고 있으려니, 되려 여자아이가 성난 눈초리로 이 쪽을 보았다. 왜 그러는지 도통 짐작가는 이유가 없다.


 그나저나 묘하게 겉보기보단 어른스런 표정을 짓는 아이다. 하지만 왜일까, 이 아이를 보면서 드는 이 이상한 기시감은 대체...


 답을 찾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 답을 머리가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느냐 하는 건 그것과는 별개의 문제다.


 어찌나 놀랐는지, 나는 외마디 비명같은 한 마디밖엔 내뱉을 수 없었다.


 "소, 소리야?"


 초등학교 4, 5학년쯤 되어 보이는 아이는, 놀랍게도 죽은 여자친구 소리와 무척이나 닮아 보였다. 마치 그녀가 되살아 돌아오기라도 한 것인양.


 ============================================

 히로인 드디어 등장!
 나이가 어리다고요? 상관없잖아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합니다!

 ...죄송요; 아무튼 본격적인 전개 시작합니다 ㅎ
?
  • profile
    yarsas 2012.07.11 18:41
    전체적인 분위기가 너무 맘에 듭니다. 야 이 시팔에선 뿜었음 ㅎ. 동양적이고 한국적인 요소가 곳곳에 보이는데 신경을 많이 쓰시는 게 보입니다.
    재밌게 잘 보고 있습니다.
  • profile
    윤주[尹主] 2012.07.12 15:19
    일부러 이것저것 챙겨넣고 있는데 예전에 짧게 배운 게 도움이 되는지 모르겠네요;;
    감사할 따름입니다 ㅎ
  • profile
    ㄴㅏㄹㅏㅣ 2012.07.11 20:37
    목빠지게 기다렸습니다 ㅠㅠ 자ㅡ이제 그럼 여주의 능력을 보여주셔요
  • profile
    윤주[尹主] 2012.07.12 15:20
    한 주가 은근히 기네요 ㅎ 느긋하게 가죠^^;
  • profile
    욀슨 2012.07.14 09:30
    어? 남반이 여자였군요. 드디어 등장한 히로인, 앞으로의 전개도 기대해 봅니다.
  • profile
    윤주[尹主] 2012.07.14 15:24
    ㅎ 감사합니다. 욀슨 님 이번 화도 기대중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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