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8.16 22:10

E. M. A. (1-8) 등장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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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금 내용이 길어서 두 번에 나누어 올립니다. 양해해 주세요;


======================================

 은비는 거듭해 명현에게 요구해왔다.


 "껴안아줘. 사랑한다고 말해 줘."


 마녀는 계속해 명현에게 대답을 강요했다.


 '말해 봐. 네가 사랑하는 저 애가, 정말 은비인지 그렇지 않은지.'

 "그만해요, 정말!"


 돌연 명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마녀도, 은비도 놀란 나머지 한동안 아무 반응 못하고 잠자코 있었다. 명현은 어딘가 서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마녀에게 말했다.


 "내가 사랑하는 건, 여기 있는 이 얘에요. 걔가 은비인지, 아니면 당신 반려인지 알 게 뭐냔 말예요!"


 마녀가 아무 대답도 않자, 명현은 이번엔 주저앉아 있던 은비에게 손을 내밀었다. 은비는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몰라 멀뚱히 명현 얼굴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명현은 그런 은비를 향해서도 입을 열었다.


 "그래 나도 뭐, 조, 좋아해. 그러니까, 껴안아주라느니, 키스라느니 하는 말만 말아줘."

 "어째서?"


 은비가 의아해하며 입을 열었다.


 "어째서 그렇게 말해? 좋아한다면서, 어째서 안아줄 순 없단 거야? 왜 키스할 수 없단 거야? 적어도 다른 애들은,"

 "그거 정말로 네가 원하는 바야?"


 은비의 말을 끊고 들며 명현이 말했다.


 "실은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좋아한다고 말하고, 안아주라고, 키스해 주라고 하는 게 정말 네가 원하는 거라고 생각해?"

 "그렇지 않아! 나는,"

 "난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아."


 명현이 워낙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자른 탓에, 은비는 살짝 몸을 움찔거렸다. 그 사실을 알아차린 건지, 이어지는 명현의 어조는 좀 더 부드러워져 있었다.


 "난 사랑받기를 원하지, 키스하고 껴안기를 바라는 게 아냐. 네가 사귀자고 했던 다른 사람들을 봐. 사귀자고 하고, 키스하고, 그리고 헤어져 버렸어. 나에게도 그럴 거잖아. 키스하고, 다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가버릴 거잖아."

 "……."

 "말이 심했다면 미안해. 화내려는 건 아니었어.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그러니까, 어, 키스하고 헤어져버릴 거라면 차라리, 그러지 않고 네 곁에 계속 있기를 선택하겠다고."

 "훌륭한 선택이네, 꼬맹아?"


 기분 나쁘게 이죽거리는 목소리. 명현은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언제 그랬는지, 옥상 철문이 소리도 없이 활짝 열려 있었다. 그 활짝 열린 문으로 무언가 시커먼 것이 기어 나온다. 검은 색 넓은 챙 모자, 검은 코트, 검은 주름치마, 검은 장갑에 검은 부츠. 한밤중에도 알아볼 수 있을 것처럼 새하얀 살갗을 온통 검은 색으로 휘감은 마녀가 그의 눈앞에 나타나 섰다.


 "이렇게 막무가내로 나오면 곤란하잖니. 저 얘가 네 소유는 아니잖아? 명백히 내 지분이 50% 정도는 있단 말야."

 "무슨 소리하는 거예요! 전 은비가 제 소유란 말은 단 한 마디도,"

 "이제 할 거잖아. '넌 내 거야.', 혹은 '내 안에 너 있다' 같은 낯간지러운 대사 하면서."

 "대체 누가 그런단 말예요!"


 옥신각신하는 마녀와 명현을 은비는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언뜻 마녀가 은비와 눈을 마주쳤다. 은비의 머리가 오른쪽으로 갸우뚱 기울어지는가 싶더니, 그녀 입에서 바람 소리 같은 가느다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명현은 그 목소리를 어디서 들어봤는지 금방 기억했다. 알영 귀신을 죽였을 때도 분명 그녀는 저런 말을 했었다.


 "신……랑?"


 순간 은비 얼굴에 낯선 누군가 얼굴이 흐릿하게 겹친다. 마치 TV 채널 신호가 서로 겹친 것처럼, 서로 다른 OHP 필름 위에 그려진 형상들이 서로 겹치는 것처럼. 명현은 그 얼굴이 퍽 낯설면서도, 한편으론 그 때문에 자기 심장이 이상하리만치 두근대고 있단 걸 깨달았다. 그것은 은비가 아니었지만, 명현이 사랑한 은비의 일면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일면이 이제, 마녀에 의해 새로운 이름이 붙여지게 된다.


 "나 여기 있어, 반려."


 마녀의 말이 떨어지자 명현은, 흡사 번개를 맞은 듯 전율을 느꼈다.






 8월 6일 토요일. 방학 중 보충수업이 없는 날.


 명현은 하숙집에서 나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차피 아무 데도 갈 곳이 없단 걸 깨닫고 그는 다시 하숙집 계단에 걸터앉아 한숨을 쉬었다.


 방에는 들어갈 수 없었다. 딱히 들어가서는 안 되는 것도 아니고, 누가 들어오지 말라고 쫓아내는 것도 아니지만 명현 자신이 내키지 않았다. 불합리하단 생각은 들었지만 따지고 들 의욕도 들지 않는다. 어차피 그 제멋대로인 마녀가 하는 짓이 다 그렇지.


 위층 자신의 방 안에서 까르르르 웃는 소리가 난다. 여자, 그것도 두 명 목소리다. 하나는 마녀의 것, 다른 하나는 은비의 것.


 일단 집에 돌아갔던 은비는 날이 밝자마자 돌연 명현의 하숙집에 찾아와 마녀와 긴 이야기를 시작했던 것이다.


 "어, 곽명현. 여기서 뭐하냐, 너?"


 같은 층 방에 사는 선배 하나가 계단을 내려오다가 명현을 보고 물었다.


 "그냥 바람 좀 쐬느라고요."

 "그래? 날씨 궂은 게 금방 비라도 쏟아질 거 같은데."


 선배 말마따나 하늘은 먹구름이 끼어 우중충하게 변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칠석이었지. 명현은 뒤늦게 그 사실을 떠올렸다.


 하늘을 올려다보던 선배가 명현에게 말했다.


 "그런데 야, 네 방에서 여자 목소리 들리는 거 같던데 누구냐? 여친?"

 "아닌데요."

 "여친도 아닌데 이 일찍부터 집에 찾아와? 거기다, 한 명도 아니고 두 명씩이나? 이야, 곽명현 너 능력 있다."

 "……."

 "근데 정작 너는 왜 여기 있냐? 안 들어가 봐도 돼?"

 "뭐랄까, 들어가기 좀 껄끄러워서요."

 "껄끄러울 게 뭐 있어. 아, 설마 그거냐? 양다리? 숨겨둔 여친들 끼리 만나서 아수라장이라도 벌이고 있는 거냐? 얼핏 들리기엔 싸우는 거 같진 않던데?"


 실은 놀러온 친구가 눈치 없이 여친 데려와 닭살 짓하는 통에 일부러 자리 비켜줬다고 하는 편이 더 사실에 가깝지만. 선배에게 그 이상야릇한 관계를 설명해주자니, 전후 사정이 너무 복잡했다. 명현은 설명을 포기하고 오해하는 대로 내버려두기로 했다.


 "뭐, 그렇죠."

 "어차피 나야 수능 되는대로 치룰 거니까 상관없지만, 너무 시끄럽게 굴지는 마라. 왜, 구석방에 진혁이 알지? 그 까칠한 성격 건드려서 좋을 거 없으니까."

 "죄송합니다. 조용히 시켜놓을게요."


 사과를 해두고 선배가 화장실로 들어간 뒤, 명현은 다시 일어나 제 방으로 돌아갔다. 방문 안은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명현은 휴, 한숨을 쉬곤 아무 생각 없이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곧 후회했다.


 "오, 왜, 왜!"

 "어, 명현이 왔네? 대체 어디 갔다 온 거야?"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요! 대체 왜 당신이랑 은비가……."

 "응? 아, 이거?"


 마녀는 능글맞게 웃더니, 다시 한 번 은비와 입을 맞췄다. 은비는 별로 낯설어하는 기색도 없이 마녀가 하는 대로 몸을 맡겼다. 그 모습을 본 명현이 가만 있을 리 만무했다.


 "으, 은비한테서 떨어져, 이 파렴치한 여자야!"


 명현이 마녀에게 달려든 통에, 우당탕하는 큰 소리가 집 안에 울려 퍼졌다. 아래층 화장실에서 이를 닦던 선배가 그 소리를 듣고 고개를 빠끔히 내밀어 계단 위를 올려다보았다. 한바탕 큰 소동이 일었던 위층은 어느새 다시 잠잠해져 있었다. 선배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혼자 중얼거렸다.


 "대체 뭐 하는 거야, 명현이 그 녀석은."






 "쉽게 말해 피난 중이었다 이거지."


 밖으로 나와 길을 걸으며 마녀는 명현에게 은비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우연히 이 마을에 왔던 마녀의 반려는 누군가를 만나 싸운 뒤 심하게 다쳐 쓰러졌단다. 어쩌다 길을 지나가던 은비가 반려를 보았고, 반려는 자기 의사와는 상관없이 은비에게 끌려들어가 씌었단 것이다.


 "본래 반려는 영혼에 가까우니까, 힘이 약해지자 살아있는 사람에게 흡수되어버린 거야. 일단 흡수되긴 해도 힘을 보충하면 다시 빠져나올 수 있으니까 큰 문제는 아니지만."

 "문제가 아니라뇨! 은비가 어떻게 됐는지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요, 지금?"


 명현이 반박하자 마녀는 조금 난감하단 듯 말했다.


 "그러니까, 그게 문제라니깐? 가만 내버려두면 우리 반려는 알아서 힘을 보충하고 이 얘한테서 분리되어 빠져나왔을 거야. 근데 누군가 자꾸 이 애를 공격하고 자극해 이 애 속에 숨어 있던 반려 인격이 밖으로 나오게 유도했어."

 "그게 무슨 말이에요?"

 "쉽게 말하면, 은비란 인격과 반려란 인격이 서로 교대되는 횟수가 많아질수록, 두 인격이 서로 섞일 가능성이 높아진단 거야."


 은비가 위협을 겪으면 겪을수록,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반려가 그녀 몸을 빌려 사용하는 횟수도 많아진다. 반려가 자주 은비 몸을 사용하게 되면 힘이 보충될 시간도 없고, 은비와 반려 둘 다 인격이 교대되는 상황에 적응해 뒤섞여버릴 수 있다고 마녀는 설명했다.


 "인간인 은비가 그런 위협에 대응할 수 있을 리는 없으니까, 어쩔 수 없었겠지. 우리 반려 입장에선."

 "어쨌든 그럼 이제 다시 분리시킬 수 있는 거죠? 은비랑 당신 반려 말예요."


 명현이 묻자 마녀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은 좀 더 시간이 필요해. 반려가 충분히 회복하지 못했거든. 하지만 이젠 회복될 때까지 내가 지켜줄 테니까 아무 문제없을 거야."

 "……무슨 근자감이에요, 그건?"


 은비가 반려인 줄 모를 때 마녀가 제대로 그녀를 지키지 못했던 걸 상기시켜주려다, 명현은 포기했다.


 "근자감? 뭐야 그거?"

 "……."


 조금 심술이 난 명현이 대답을 않는 걸, 마녀는 금세 눈치를 챘다.


 "근데 괜찮겠어?"

 "뭐가요?"


 장난스럽게 묻는 마녀 말에 명현은 조금 심통이 나 되물었다.


 "반려 말야. 내가 이대로 데려가 버려도 좋은 걸까, 싶어서."

 "좋은 걸까, 하고 단 일 분 일 초도 생각해본 적 없잖아요. 어차피 자기 맘대로 할 거면서."

 "어머, 어떻게 알았니?"


 깔깔대며 웃는 마녀를 명현은 불만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상관없어요. 제대로 은비와 떼어주기만 하면 돌아가든지 말든지."

 "정말 그럴까?"


 마녀는 뭔가 알고 있단 듯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뭐가, 정말 그럴까, 에요?"

 "너 이 얘 좋아한다며. 예전엔 별 신경도 쓰지 않았는데, 한 일 주일 정도 전부터 갑자기 은비에게 관심 갖게 되었다면서?"

 "누가 그래요?"

 "네 친구들."


 이 입 싼 인간들을 그냥! 명현이 부글부글 끓는 속을 억지로 진정시키고 있으려니, 마녀가 그 속에 아예 기름을 쏟아 부어버린다.


 " 일주일 정도 전이면, 딱 반려가 은비에게 씌었을 때네? 성격이나 행동까지는 아니어도, 몸 안에 든 내용물이 바뀌면 아무래도 뿜어내는 분위기는 좀 달라지니까. 그래서 갑자기 관심을 갖게 된 건 아닐까나?"

 "뭐에요, 그래서! 지금 제가 당신 반려에게 관심 있기라도 하단 거예요, 뭐에요!"


 자꾸 속을 긁어대는 마녀에게 명현은 참지 못하고 화를 내었다. 그런 명현에게 놀라기는커녕 마녀는 오히려 그에게 더 가까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광대처럼 웃던 그녀 얼굴에 지금은 미소 한 점 띄워져있지 않았다. 명현은 섬뜩해져 오히려 자신이 뒤로 조금 물러섰다. 그런 그에게 마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딱딱하게 말했다.


 "글쎄, 나도 그게 정말 궁금하단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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