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테넬라판타지아(프롤로그)

by 로케이트 posted Jan 09,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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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똥 싸지마. 어디서 먹히지도 않을 헛수를 쓰고 있어!”

 

  금빛 머리칼, 그 사이로 드문드문 검은 머리가 돋보인다. 정장과 같은 검정 웃옷에는 새하얀 와이셔츠가 빛을 발하고 있고, 목 가까이에는 빨간 끈 리본이 포인트를 주고 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앳된 모습이 귀엽게 느껴지는 미소년의 얼굴이 살짝 드러나고 있다. 이 소년의 이름은 시냐크로, 말하자면 예술을 관장하는, 인간들의 표현으로는 ‘신’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예술의 신이라는 이름과는 걸맞지 않게 그가 내뱉은 말은 장맛비 맞은 개가 멍멍 짖는 듯한 상스러운 표현이다.

 

  “내… 내가 언제! 괜히 이기려고 트… 트집 잡지 마!”

 

  반대편에서 말을 더듬으며 변명이라는 걸 대놓고 보여주는 이 친구는 명색이 문학의 신 에테넬라이다. 그는 지금 조그만 여자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다. 빨간 머리카락이 어깨를 덮는 모양새가 밤길에 혼자 서있으면 뭇 외간 남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을 것 같은 매력을 주고 있다. 시냐크와 마찬가지로 정장을 한 모습에서 어딘지 모를 기품이 느껴진다. 그러나 두 양반이 펼치고 있는 꼴을 보자면 기품은커녕 한심함에 푼수 끼가 뚝뚝 흐르고 있다.

  그러니까 이 두 양반은 방금 전까지 체스라는 인간의 게임을 하고 있었다. 알다시피 신들의 세계는 전쟁과 호환, 마마도 없을뿐더러 정말 아무 일 없이 평화로운 나날을 이어오고 있기 때문에 신들은 매우 심심한 편이다. 신전에서 신탁을 내리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무미건조한 일상을 견디는 것은 아무리 신이지만 정말 갑갑한 일이다. 게다가 나름대로는 신이기 때문에 누구한테 빌 수도 없고, 심심함은 혼자서 해결해야 한다. 시냐크와 에테넬라가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찾아낸 것은 바로 이 체스였다. 개 주인도 가끔 개밥을 먹어보고 싶을 때가 있듯이 신도 이따금은 인간의 놀이를 즐길 때가 있다. 몇 달 전 가져온 화투도 이제 어느 정도는 질렸겠다, 새로운 놀이를 도입해서 또 며칠 무료함을 견뎌 보자는 게 그들의 생각이었다. 덧붙여진 설명서를 대충 읽으며 두 신 양반은 경기에 대한 나름의 전략적 구상을 머릿속으로 짜기 시작했다.

  그런데 생각 없이 시작한 체스 게임이 어쩌다보니 예기치 못한 상황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시냐크와 에테넬라는 신의 세계에서 누구보다도 절친함을 자랑하는 사이이지만, 이와 더불어서 둘 다 찡찡대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떼쟁이들이다. 유치하고 쓸 데 없이 자존심만 센 이들이기에, 체스 경기에서 역시 예상대로 자존심 결투가 벌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때, (누가 먼저 이야기했는지는 몰라도) 사소한 말다툼이 번져 두 신은 상상을 초월하는 어이 상실 내기를 시작하고야 만 것이다.

 

  ㅡ체스에서 진 쪽이 힘을 봉인한 채로 인간의 몸에 빙의해 그 주인으로 살아간다.

 

  이게 말이 되는 소린가. 아무리 할 일이 없어도 신은 신이다. 가끔 신이 동물로 변신해 예쁜 여자를 유혹하기도 하였다는 전례가 있긴 했지만, 그래도 신이 직접 인간이 되는 것(구체적으로는 인간의 몸에 빙의하는 것)은 유례에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 유례없는 바보짓을, 지적 사유의 결정체라는 예술과 문학을 관장하는 신들이 벌이고 있는 것이다.

  시냐크와 에테넬라가 똥고집, 황소고집에 고집불통인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다. 신도 멍청할 때가 있는지라 뱉은 말을 물릴 수 있는 것인데, 이 둘은 자존심 때문에라도 먼저 얘기를 꺼내지도 못하고 내기를 계속 진행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내기도 어느덧 판세가 조금씩 드러나면서 서로간의 희비를 엇갈리게 하고 있었다.

  그리고 에테넬라는 지금 슬쩍 자기 앞에 있는 시냐크의 검정색 룩(Rook)을 판 밖으로 빼내려다가 딱 걸린 상황이다.

 

  “히히…. 내가 이긴 거다?”

 

  시냐크가 미소년 같은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음흉한 미소를 짓는다.

 

  “멍청아! 무… 무슨 소리야! 아…아직 겨… 경기가 끝나지 않았다고!”

 

  이런 걸 최후의 발악이라고 하던가. 에테넬라는 뭐라도 씹은 표정을 한 채로 의미 없는 반항성 멘트를 날리고 있다. 하지만 말판에 남은 흰색이라고는 킹(King)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더 이상의 변명은 패배감만 불러올 뿐이다. 십팔사략 같은 묘수가 기적처럼 나타났으면 싶지만, 한 칸 움직인 에테넬라의 킹은 여지없이 시냐크의 퀸(Queen)에게 먹히고 만다. 즉, 게임오버다.

 

  “어라 에테넬라씨, 경기가 끝났네요? 히히히. 우리 내기가 뭐였을까요~? 지금이라도 깨끗이 네가 나보다 한 수 아래라는 걸 인정하면 봐줄 수 있는데에.”

 

  “죽을래. 내가 더러워서라도 내기한 걸 지키고야 만다.”

 

  속을 긁을 때까지 긁어놓는다. 이런 모욕까지 당하고 자존심을 굽힐 에테넬라가 아니다. 루루팡! 에테넬라가 주문을 외치자 큰 빛이 나타나 그를 감쌌다. 주변에서 하얗게 발하던 빛은 에테넬라의 몸에서 노란 기운을 뽑아내더니 이내 그것을 흡수하여 노란색으로 변한다. 그러다가 빛은 주먹만 한 크기로 덩어리진 후에 다시 에테넬라의 몸 깊은 곳으로 스며든다. 극히 짧은 순간에 벌어진 이것이 바로 신이 자신의 힘을 깊은 곳에 봉인하는 자기봉인의 마법이다. 자기봉인의 마법을 시행한 신은 인간을 상회하는 선까지는 힘을 사용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그 이상의 권능은 봉인 해제의 조건이 만족될 때까지 사용할 수 없다. 에테넬라의 경우 봉인 해제의 조건은 ‘인간의 몸에서 빠져나오는 순간’이다.

 

  “헐. 정말로 패배를 인정하지 않을 셈이야?”

 

  “물론이지. 너한테 무릎 꿇느니 차라리 구제역 걸린 돼지고기를 먹겠어. 난 지금 힘이 봉인된 상태니까 빙의의 권능은 네가 사용해.”

 

  시냐크도 나름대로 자존심이 강하기 때문에 에테넬라에게 더 이상의 만류는 하지 않는다. 시냐크가 조용히 루루피 하고 주문을 외치자, 조금 전 에테넬라의 몸에 스미었던 노란 빛덩이가 다시금 튀어나오더니 이내 하늘 저편을 향해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그리고 그 순간 그를 이루고 있던 육체는 물처럼 흩어져 대기 사이로 스며들었다.

 

  “그럼, 고생 좀 하라지.”

 

  시냐크의 얼굴에 또다시 음흉한 미소가 번진다. 구름 위에서 내려다보는 하늘은 오늘따라 유난히 더 맑고 푸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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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명에 큰 의미를 두지 않다 보니까

뭔가 들어본 듯한 이름들이 자꾸 눈에 보이는 듯한데요. 착각입니다. 착각..^ ^;

 

그냥 가볍게 가볍게 속전속결로 썼습니다.

지금 개인적으로 조금 바쁜 상황이어서

다음주 주말 쯤에서야 여유롭게 뭔가를 해볼 수 있을 것 같네요.

 

그때 되면 다른 분들이 쓴 글에 대해 비평도 해보고

이것저것 많이 시도해볼 생각이니 기대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