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8.22 17:28

웃으며 떠난 네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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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를 지었나이다. 죄인이옵니다.


당신의 어린 양이 황야에서 울부짖나이다.


그러나 이미 길을 잃고 가시덤불에 걸려


헤어나지 못하게 되어버렸으니!


다시 삼가 아룁니다.


저는 죄를 지었나이다. 죄인이옵니다.


나락에 빠진 당신의 종을 건져 주소서.


죄는 굴레가 되고 족쇄가 되어 끝없는 수렁에 저를 끌어들입니다.


 


죄 지은 건 모두 그 여자로 인함입니다. 사람들과 운명에 버림받고, 끝내 당신마저 외면한 그 여자입니다. 온갖 죽음을 보았고, 다루고, 끝내 당신의 권위에 도전하기에 이른 그 여자입니다. 당신의 수족 가운데 말째, 가장 비천하고 하찮은 자인 저는 그 여자를 죽여 만인의 본보기요, 교훈으로 삼고자 하였나이다. 하늘 두려운 줄 모르는 자들을 심판하고, 그리하여 당신의 권위가 건재함을 적들에게 보이려 하였나이다.


여자의 죄는 이미 죽은 자를 다시 일으켜, 안식을 방해하고 순리를 거스름으로서 하늘과 땅을 더럽힘이옵니다. 지난 사흘 남짓 저 미천한 종이 본 것만도 차마 입에 담기 민망할 정도거니와, 위대한 카드몬, 곧 지금 인간들의 아버지를 자신의 사악한 마법으로 깨우려 든 것은 뭇 신들의 권위에 도전하는 오만의 증거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죽일 수 없습니다. 솜털 하나 건들 수 없습니다.


권능을 대변하고 이름을 높여야 할 자로서 부끄러울 일입니다.


당신의 종은 부끄러움을 잊었나이다. 그것조차 모르는 자나이다.


 


생각건대 이 모든 죄는 그 때가 시작이었습니다.


군영을 지키는 병사들이 수다스레 떠드는 이야기를 듣고서, 이 여자에 대해 알고 싶어진 바로 그 저녁에 시작된 죄입니다.


여자는 죄인입니다. 비단 당신께만 죄를 진 것이 아니라, 인간들 사이에서도 죄인이었습니다. 여자가 그 병사들 틈에 있던 것도 모두 그가 범한 죄 때문이었습니다.


맨 앞에 나가 침범해 오는 적과 싸워라. 네가 살면 이 나라도 살지만, 이 나라가 무너지면 너 역시 무사하진 못할 것이다. 그것이 그 여자에게 내려진 형벌이었습니다.


미천한 여자였나이다. 의지할 곳 없는 여자였나이다.


점령당한 민족이었고, 대대로 유랑하며 남의 시체나 치워주던 더러운 집안이었나이다.


그나마 전쟁으로 모두 죽어서, 살아남은 건 여자만이 유일했나이다. 병들고 지친 그 여자뿐이었나이다.


죽음은 여자에게 전혀 새롭지 못했나이다. 그저 매일 먹는 감자 한 알, 죽 한 그릇처럼 흔하디흔한 것에 불과했나이다.


용서 하소서, 이 충직하지 못한 종을. 가엾은 여자 솜털 하나 건드리지 못하는 불쌍한 자를.


 


병에 대해 말씀드릴까 합니다.


물론 여자의 병입니다. 결코 밝은 빛 아래 나와 살 수 없는 저주받은 병입니다.


대낮에는 검은 상자 같은 가마나 빛이 새어들지 않는 두꺼운 천막 안에 숨어 살고, 한밤중이라도 행여나 달빛에 다칠 새라 사막의 상인들처럼 천과 옷가지로 온몸을 둘러싸야만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그 병이올시다.


태어날 때부터, 아니 여자의 부모형제로부터 물려받은 병이, 겉으로 드러난 살갗을 태우고 좀먹어 끝내 죽게 하는 병이올시다.


여자에게 죽음을 선고하는 일은, 언젠가 닥칠 죽음이 약간 더 빨리 찾아온다는 것 외에 아무런 의미가 없었나이다.


무엇 때문에 죽어가는 자의 심장에 칼을 겨누어야 한단 말입니까.


 


무엇보다 그녀는 진정, 죽음과 맞바꾸어 영원히 살 수 있음을 아는 보기 드문 이였나이다. 현자였나이다. 죽음의 두려움을 알면서 그것의 실체를 마주보며 웃을 수 있는 한 점 부끄럼 없는 이였나이다.


겁쟁이는 죽음이 닥치면 웃지 못하게 되어버립니다. 무모한 자는 죽음이 닥쳐도 그것이 두려움을 알지 못하고 바보같이 행동합니다. 땅바닥을 기는 버러지보다도 가치 없는 게 그들 목숨이겠습니다.


그녀는 진정 인간입니다. 카드몬의 후손입니다. 죽은 카드몬을 되살려 가족의 원수, 형벌을 내린 나라를 지켜낸다면 그 업적으로 남을 것이고, 이제 여자 외에 이을 이 없는 죽은 자 살리는 법을 양피지로 옮기면 그 기록으로 남을 것이며, 단 한 사람이라도 여자를 알아주면 그 기억으로 남을 것입니다. 그건 겁쟁이도 할 수 없는 일이요, 무모한 자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어떻게 인간을, 진짜 신과 왕들과 비교해도 손색없는 진짜 인간을 스스럼없이 죽일 수 있는지요.


그것이 당신의 정의이나이까? 그것이 정녕 당신의 권능이나이까?


때때로 여자는 눈물을 흘립니다. 죽을 날이 임박해서도 아니요, 살아온 날들이 불쌍해서도 아니고, 다른 그 어떤 이유도 아니올시다. 오로지 의미 없이 남았다 사라질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올시다. 이제껏 제가 사람을 벤 것은 그들이 의미 없이 살기 위해 몸부림쳤기 때문이지, 의미 있게 살기 위해 몸부림쳤기 때문은 아니올시다.


더군다나 그가 다가올 죽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아는 이라면, 진정 그야말로 영원히 기억에 남아 신의 반열로 오를 자격이 있을 것입니다. 당신이 두려워하는, 신의 자리로 올라서는 인간 말이올시다.


 


부정하지도 않고 거부하지도 않습니다. 저는 죄를 지었습니다. 죄인입니다.


죗값은 달게 받겠나이다. 그러니 허락해 주소서.


그녀가 원래 주어진 삶을 충실히 정리하도록 도운 후, 서로 웃으며 떠나보낼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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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계속해 역행합니다.


아마 다음 회에 끝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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