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에서 북쪽 소로에 접어든다. 유리에가 내 옆에 서서 길을 안
내했다.
“이리로 가다 보면 데인 쪽으로 가는 길이 나와.”
또 부루퉁한 표정이었다. 해돋이를 보며 잠깐 기분이 풀리는 것
같더니만 다시 돌아왔다. 그에 나는 의구한다.
그녀는 분명 열다섯 정도의 소녀고, 그 나이대의 소녀는 보통 신
비스러운 것, 기묘한 것에 왕성한 호기심을 보이는 게 정상이다. 그
리고 역사를 뛰어넘어 도래한 영웅기사님과의 만남이란 아무리 생각
해도 신비막측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유리에는 어째서 이토록 두근두근 흥미진진한 상황에 대
면하여, 술을 일주일쯤 못 마신 제나인 헤이튼처럼 퉁명부리고 있는
것일까?
“저기, 레이디 앰린?”
“왜!”
선두에는 나와 유리에만 나란히 걷고 있다. 몇 걸음 떨어진 곳을
엘리제가 느긋이 걷고, 그 뒤로 수행하듯 학자들이 따르는 상황이
다. 난 지금이 유리에의 기분을 풀어 줄 적기라고 판단했다.
“루 두루디밥바~ 멍멍!”
유리에는 마물의 시체를 처음 본 용병처럼 질린 표정을 지었다.
“뭐야, 뭐야!”
“루두루~ 리비디밥바~ 멍멍!”
입술 끝을 실룩거린다.
“루뚜루, 루뚜루, 라라리랍바~ 멍멍멍!”
“우우…….”
왠지 울상을 짓는다.
“멍! 멍! 바라밥바바~ 멍멍 멍멍멍!”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후렴구를 부르고 나자 드디어 유리에가 웃
었다.
“우, 우하하, 와하하하, 푸로리는 멍청이야!”
아무 논리 없이 하는 그녀의 비하발언은, 의외로 호감의 표현일지
도 모른다.
“그게 아니죠 멍멍! 푸로리는 아주 똑똑해서 말도 할 줄 안답니다
멍멍!”
“우하하하! 이히히히…… 으윽.”
웃다가 배가 아픈 듯 인상을 쓰는 유리에.
좋아, 잘 됐다. 좋은 추억으로 간직하자. 이런 민망한 공연 평생
두 번 다시는 못해 볼 테지.
유리에가 웃음을 그치길 기다려 다시 말을 건다.
“웃으니까 정말 보기 좋네요. 레이디 앰린은 웃는 얼굴이 참 잘
어울려요.”
아니, 열 살 차이 나는 소녀에게 작업 멘트 비슷한 걸 하게 될 줄
은 나도 몰랐다구. 어쩔 수 없잖아?
“멍멍!”
응?
“고마워 멍멍!”
“저기, 레이디 앰린……?”
“왜 멍멍?”
나는 거대한 위기감을 느꼈다.
나로 인해 노루스의 귀족 소녀들 사이에 이상한 말꼬리가 유행해
서야 조상님들을 뵐 면목이 없다! 아니, 가족 내력을 생각해 보면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기실 지도 모르겠지만, 아니, 꼭 멍멍 말꼬리
가 유행하리란 보장도 없지만, 아무튼 이대로 좌시해선 안 되겠다.
“…… 귀엽네요.”
난 결코 열 살 어린 소녀에게 작업을 거는 게 아니다.
“뭣?! 말도 안 돼? 귀여워!”
보라. 우리말이 서툰 탓인지 억양이 좀 이상했지만, 유리에는 내
가 예상한 반응을 보였다.
“쳇, 멋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안 할래. ”
“그래요. 레이디 앰린은 거칠고 당당한 모습이 어울려요.”
내 입 발린 말에 -도대체 어떻게 이게 입 발린 말이 되는지는 모
르겠지만- 유리에는 웃었다.
“푸로리, 쫑자 언제까지 할 거야?”
한동안 실실 웃다가, 문득 유리에가 물었다.
사실은 이것도 예상하고 있던 질문이었지만, 문득 나는 긴장했다.
소녀에게 진지한 얘길 할 때는 정말 단어를 잘 골라서 써야 하는
것이다. 특히 우리말에 서툰 귀족 아가씨를 상대로 할 땐 더더욱!
“걱정 마세요, 언젠가 당신의 곁으로 갈 테니까. 평생 떨어지는
게 아니라구요?”
결코 소녀에게 작업 거는 게 아니다.
“오지 마, 우와앗! 저리 가!”
“아하하하.”
이 빨간 머리 아가씨는 정말이지 소녀다운 감수성이 없다- 없을
뿐더러 오히려 거부반응을 보이는 건 어떻게 된 일일까? 그러면서
험한 용병의 세계엔 소녀답지 않은 관심을 보이는 것이다.
“너네를 부르길 잘 한 거 같아.”
유리에가 또 문득 말했다.
“예? 누구를 불러요?”
“너네 용병대, 내가 골랐거든. 잘 고른 거 같아.”
범인은 이 안에 있었다?!
어떻게 우리 용병대가 앰린 대공가의 차녀를 호위할 수 있었나
했더니 그 호위 대상자의 취향이었던 건가. 재미있는 일이다.
“푸로리랑 만나서 진짜 좋아.”
마땅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아 잠깐 말없이 걸었다.
유리에는 다른 곳을 보며 다시 말했다.
“조금만 더 가면 갈림길이 나오거든? 거기서 왼쪽 길로 가면 돼.”
말하고선 뒤돌아서 여학자들에게 가는 유리에. 난 소녀의 뒷모습
을 바라본다. 엘리제도 소녀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그녀는 어느새 내 옆에 와 있었다.
“죄 많은 남자로구나, 나의 종자는.”
“그런 거 아니거든요?”
나의 기사님은 아무래도 연애소설 광인 것 같다. 지금은 변명하기
보다 말을 돌리자.
“그것보다 반드시 지금 꼭 어떻게든 여쭤봐야 할 게 있는데요.”
“그렇게 과하게 부연하지 않아도 된다. 말을 돌리도록 허락하마.”
단박에 들켰다!
아니, 하지만 물어볼 건 정말 있다.
“대체 뭐 하러 오셨어요?”
급하게 말하고 나니 왠지 추궁하는 말투가 됐다. 엘리제는 흔들리
는 시선으로 내 진의(眞意)를 가늠하고 있다.
신기한 일이다. 평소의 당당한 모습과 완전히 괴리된 그 섬세함이
또 묘하게 어울린다. 나는 다 인지할 수도 없는 강하고 고귀한 존재
임에도, 어떻게든 지켜주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는 건 그런 이유일
것이다.
“아니, 그게 아니라- 엘리제, 어떤 이유로 이 시대에 오신 거예
요?”
그제야 엘리제는 미소를 머금었지만, 왠지 곤란해 보이는 미소였
다.
“그거야…… 이렇다 할 이유 없이, 그저 왔을 뿐이다.”
우와, ‘신의의 상징’인 기사님이 빤히 보이는 거짓말을 한다.
분명히 오랫동안 기다렸다고 했다. 서두르는 마음을 누르지 못하
겠다고 했다. 시간을 뛰어넘기 위해 신의 가호마저 버려야 했다고,
그녀는 말했었다.
내 불신의 눈초리에 엘리제는 웃어 보였다.
“너무 그렇게 보지 말거라. 결코 그대에게 폐가 되는 일은 없을
것이야. 오히려 나는 내 생애 마지막 종자인 그대에게 많은 것을 해
주고 싶은 기분이다. 내가 이 시대에 온 목적 같은 건, 이 기분에
비하면 아주 하잘것없는 일이 되어 있다.”
“아.”
문득 떠올린다.
“…… 그렇다면 사백 년이나 지나고 말았다는 것인데, 희소식은
아니로구나.”
“혹시, 놓친 건가요?”
생각 없이 말하고 나서 고개를 돌렸다. 엘리제는 금방 울 것 같은
촉촉한 표정으로, 먼 조각구름을 보고 있었다. 난 후회했다. 말하지
말았어야 했다.
“…… 사백 년 후이거나 이천육백 년 후이거나 그리 구애될 것은
없느니라……”
그녀는 빤히 보이는 거짓말 따위 한 적이 없었다. 그녀는 정말 아
무 이유 없이 온 것이다. 그녀는 ‘이 시대’에 연고 따위 없다. 그녀
가 가야 했던 시대는, 마법이 사라지고 기사가 변질된 ‘이 시대’가
아니었다. 그녀가 이루고자 했던 것 -무엇인지는 나로선 모르지만-
그것은 이미 수천 년 전에 끝나 버린 모양이다.
그녀의 도래는, 너무 늦어버린 것이다.
엘리제는 날 탓하지도, 다른 설명을 하지도 않았다. 나 역시 그녀
에게 다시 말을 붙이기엔 염치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한동안 말
없이 걸었다.
그리고 유리에가 말한 갈림길에 도달했을 때, 나는 없던 말까지
잃었다.
서쪽 사면으로 이어진다던 소로는, 수풀과 덩굴로 뒤덮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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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죄송합니다. 흑흑.
제 입으로 말한 연재 주기도 못 지키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수요일에 중요한 일이 있어서요, 그 여파라고 생각합니다만,
실제로 전처럼 쭉쭉 써지지 않는 느낌이 있어요.
다음주에도 제대로 된 연재는 힘들어요 하고, 미사카는 솔직하게 고백한다거나 해봅니다.
(누구냐, 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