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8.29 21:18

시 지우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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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씩 묵혀두었던 시를 내 마음속에서 지워가는 시간.
그만큼 조용하고 경건한 시간은 없었습니다.

꿈속에서 떠오르던 시, 순간 번뜩이며 새겼던 시, 자연을 만졌던 시,
이 모든 허물들이 씻은 듯이 흘러 내려가고
내 손길을 거쳐간 이름표 달린 시들도
내 가슴의 눈물과 함께 불로써 타올라 떠났습니다.

나는 너무 먼 길을 함께 돌아왔습니다.
나도 시도 서로 맞잡고 의심 없이 걸어온 길이었습니다.
이제 나의 마음 한구석에 새하얗게 내려앉은 눈이 치워지면
그곳에 시린 바람이 가득 불어 들어와 내 굶주린 고통을 채울 것입니다.

지난 수많은 별들이 사르르 녹았다가 사라진 언덕 위에 다시 서서
굳게 먹은 마음을 하늘로 풀어올렸던 초원을 둘러보았습니다.
시가 내렸고, 시를 해매었고, 시를 속삭이며 울었던 기억이 살아나고
어머니, 별, 새 그리고 바람과 함께 거닐었던 초원 위에
텅 빈 호수 하나 천천히 커져 갑니다.

그리워서 옛날의 시를 불러보기도 하고 안타까워 울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슬픔이 분수처럼 솟구쳐도
나에게는 어쩔 수 없이 밟아야 하는 가시밭길이 있습니다.
그 길을 함께 가는 동료에 나의 시는 없을 것입니다.
상처 입은 영혼이 갈 길은 양손을 맞잡은 나밖에 없다는 것을 알기에.

언덕을 내려오며 내 이름자 새겨진 무덤에 작별인사하고,
주위에 들려오는 풀벌레소리와 새소리도 뒤로 한 채
나는 어쩌면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났습니다.
그저 찌그러진 돌만 횅하게 구르는 나 혼자의 길을 향해.

그리고 남아 있는 추억 한 조각을 풀어헤쳐
허공 위에 손가락으로 나의 성과 이름을 가진 시 하나를 끄적이고
그동안의 내 아침을 장식해온 수많은 시들과 함께
녹아가는 눈이 된 듯, 잠깐 피어오른 미소가 된 듯,
부끄러움에 고개 숙인 나의 시를 지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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